50대 유망작가...12월 31일까지 사비나미술관 전시
모듈화를 통해 색면 디자인 ...전통 동양화 재해석

동네 골목길로 접어드는 기분이 이런 걸까. 낯선 탐험길로 들어서는 설레임일까. 어쩌면 죽림칠현의 공간으로 빠져드는 것은 아닐까. 이런 저런 생각들을 하게 만드는 전시장 입구가 이채롭다. 12월31일까지 사비나미술관에서 ‘색죽(色竹)’전을 갖는 권기수 작가의 전시장 풍경이다.

권기수 작가
권기수 작가

 

죽림칠현(竹林七賢)은 중국 위진 시대(3세기) 지식인 7명이 속세의 억압과 예교(禮敎)를 벗어나 자유로운 삶과 사유를 추구하며 대나무 숲에서 모였던 데서 붙은 이름이다. 세상은 전쟁으로 흐느적거리고 있었고 권력은 승자와 패자를 갈라놓았지만, 사람의 마음까지는 통제하지 못했다. 소란과 정치의 소용돌이에서 비켜선 곳에 대나무 숲이 있었다. 바람이 스쳐 지나가면 수천 개의 잎 끝에서 떨림이 일고, 그 소리는 누구의 명령도, 어떠한 예의의 규범도 따르지 않았다. 그곳에 일곱 사람이 모였다. 세상은 그들을 죽림칠현이라 불렀지만,그들에게 중요한 것은 이름도, 일곱이라는 숫자도 아니었다. 그저 마음이 통하는 이들이 서로를 찾아 숲으로 걸어 들어왔을 뿐이었다. 훗날 수많은 이들이 삶의 무게에 견딜 수 없을 때마다 떠올릴 수 있는 하나의 풍경이 된 이들이다. 바람이 불면 대숲은 흔들리고 세상은 조금 더 넓어졌다. 죽림칠현은 바로 그 틈, 세상과 이상 사이의 아주 가느다란 틈을 살아낸 사람들이었다. 그래서 지금도 누군가는 그들을 떠올린다. 삶이 너무 무겁다고 느껴지는 날이면, 대나무 잎 사이로 스며드는 바람의 길을 따라 그들의 발자국을 조용히 밟아본다. 그런 감성을 권기수 작가는 화폭에 풀어내고 있다. 조금쯤 흔들려도 괜찮다고. 굽지 않기에, 우리는 꺾이지 않는다고 말해주는 듯하다.

 

 

 

화폭속 동구리는 죽림칠현의 화신이다. 대나무 숲은 누군가의 목소리가 높아질수록 휘청휘청 흔들리며 그 소리를 품어 주었다. 그들의 하루는 단조로웠다. 술을 마시고, 음악을 연주하고, 철학을 이야기하고, 때때로 아무 말 없이 바람을 바라보는 시간도 있었다. 하지만 그 단조로움은 세상의 복잡한 질서를 거부하는 의지의 단순함이었다. 그들은 관직을 버리고 예의와 법도라는 이름의 굴레를 피해 숲으로 왔다. 그러나 결코 도망치기 위해서가 아니었다. 자기 자신의 목소리를 잃지 않기 위해서였다. 대나무 숲에서 그들은 세상보다 더 큰 세계를 마주했다.

 

 

 

작가는 요즘 캔버스 앞에 앉기만 하면 숨이 먼저 막힌다. 색들은 너무 많고 말들은 너무 많고 세상은 더 말할 것도 없이 너무 빠르다. 그러다 문득,죽림칠현이 머물렀다는 대숲을 떠올린다. 그가 그곳에 가본 적이 없지만 묘하게 장면이 그려진다. 빛이 잎사귀에 닿아 얇은 초록을 천 겹으로 갈아내는 순간, 바람이 그 틈 사이로 흘러 들어가 자기만의 선을 긋는다.  아마도  그들은 세상을 버린 것이 아니라 세상이 흉내내지 못하는 리듬을 찾은 사람들이었을 것이다. 무위니 자연이니 하는 말보다 작가에게 그 ‘리듬’이 더 중요하게 느껴진다.

예술가에게 리듬은 숨처럼 들고나는 것이라서. 그는 오늘도 캔버스 위에서 스스로에게 묻는다. “너의 속도는 어디에 있느냐”고.

 

 

 

정해진 구도나 멋을 부린 붓놀음보다 그는 그 질문이 그를 예술가로 만든다고 믿는다.칠현의 목소리는 들리지 않지만 바람이 지나가는 소리는 안다. 그들은 그 바람을 따라 자기 마음의 결을 놓치지 않았겠지. 그 결이 모여 자유라는 모양을 만들었고. 그도 그런 그림을 그리고 싶다.

 

 

 

정확하지 않아도 좋고 완성되지 않아도 좋다. 단지, 한 줄의 선이라도 그가 믿는 리듬으로 그어진 선이면 된다. 오늘의 바람은 이렇게 말하는 듯하다. “흔들려도 괜찮다. 흔들림이 바로 너의 선이니까.”  그는 그 말을 조용히 믿기로 한다. 그리고 다시, 캔버스 앞에 앉는다.

 

 

이번 전시는 전통 동양화에서 상징적 의미를 지닌 대나무와 오방색을 현대적으로 재해석하여 디지털시대의 색채와 구조, 참여형 설치 개념을 결합한 실험적 프로젝트이다. 작가는 전통적으로 수묵과 일필휘지의 필획으로 표현되던 대나무 회화의 관념을 전복하고 ‘색으로 된 대나무’라는 새로운 개념, 즉 색죽(色竹)을 제시한다. 여기서 대나무는 먹선으로 그려지는 평면 회화의 대상이 아니라 입체적이고 색면화된 구조물로 재탄생한다.

작가의 수작업으로 조합된 500여 종의 컬러는 디지털 밑그림과 손의 감각이 결합된 방식으로 일필휘지는 해체되고 대신 디지털 언어의 특성인 모듈화(Modularity)와 정확성(Precision)을 갖춘 색면 디자인이 그 자리를 대신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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