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2일 나의 모친이 향년 92세로 소천 하늘에 별이되었다. 황급히 부고장을 날리고 고향 군산으로 향했다.

식장에서 많은 체육인 교우들과 해후하면서 모친의 이승에서 마지막 발자취를 반추하며 2박 3일간의 여정을 마무리했다. 인간이란 존재는 누구나 유효기간만 살다 떠나가는 나그네다.

또한 탄생과 죽음 이란 마치 바닷가 파도 물결처럼 치솟음과 사그러짐이 쉼없이 반복되는 현상이다. 이는 평소 삶에 관한 나의 소신이다. 많은 체육계 인사들을 비롯 조문객이 왕림(枉臨)한 식장은 글을 쓰고 있는 필자의 입장에선 인사만 나누고 무의미하게 헤어지기엔 아쉬움과 미련이 많았다.

더욱이 초등학교 때부터 야구 선수 생활을 했던 나는 서울에서 내려온 조계현 전 기아타이거즈 단장을 비롯한 고장량 김광현 상철규 이병휘 최봉규등 동료들과 함께 옛 추억이야기로 꽃을 피웠을땐 온몸에 도파민과 엔돌핀 그리고 다이돌핀 세로토닌등이 범벅되어 솟구쳐 올랐다.

곽동성 위원 조계현단장 김완수위원 (좌측부터).
곽동성 위원 조계현단장 김완수위원 (좌측부터).

1978년 6월 중학교 1학년때 난 형편없는 야구 실력으로 퇴출당해 정든 그라운드와 작별을 했다. 그리고 중학교를 졸업과 동시에 복싱에 입문 오늘에 이르렀다.

1982년 전북 신인대회에 첫 출전 플라이급에서 4연속 KO승을 거두고 최우수복서에 선정되었다. 5년동안 야구 방망이를 휘두른덕에 팔근육이 강해져 별다른 복싱 스킬이 없어도 펀치력만큼은 통했던 모양이다.

그리고 전국체전 전북 선발전에서도 3연속 KO승을 거두며 1차 선발전에서 우승을 차지했다.  그해 6월 서울 잠실 실내 체육관에서 벌어진 제 32회 학생선수권대회에 플라이급으로 출전했다. 자신만만했다.

그러나 1회전에서 한영고 오경묵 선수에게 완패를 당하면서 중앙무대의 높은벽을 실감했다. 나의 주먹은 2부리그 에서 통했던 현실을 깨닫게 만든 매우 중요한 일전이었다.

김주원 관장과 홍성민 SM프로모션 회장(우측).
김주원 관장과 홍성민 SM프로모션 회장(우측).

여담이지만 그대회에서 전북체고가 종합우승을 차지했다. 4월에 김명복배에서 최우수선수상을 받은 전북체고 이철승은 이번 대회에서 LH급에서 또다시 우승을 차지 2관왕을 차지한 대회였다. 각설하고 내가 경기에 패한 1982년 7월 16일 그날은 잠실야구장 개장기념대회가 열린날 이다.

학생 실내 체육관에서 걸어온 나의 눈앞에 서울의 또 하나의 명물로 등장한 잠실종합운동장이 시야에 포착된다. 그날 경북고와 잠실야구장 개장기념으로 일전을 펼칠 군산상고 야구팀선수들이 뚜벅뚜벅 경기장을 향해 걸어가고 있었다.

옛 추억이 묻어난 동료들과 마주친 나는 인사를 나눈후 경기장에 입장했다. 그날 경북고 선발은 에이스 성준 문병권이 아닌 유격수 류중일이었다. 

복싱 대통령 장정구 프로야구 레전드 조계현 단장(우측).
복싱 대통령 장정구 프로야구 레전드 조계현 단장(우측).

그날 군산상고는 1회초에 4실점 하며 무너졌지만 역전의 명수답게 끝까지 추격전을 펼쳤다. 그러나 6ㅡ5로 경북고에 분패했다. 내가 복싱경기에서 패한 것보다 군산상고 야구팀이 경북고에 패한 현실이 더욱더 가슴 아팠다.

그리고 세월이 흘러 2023년 친구 고장량이 아내상을 당한 1월 23일 익산 장례식장에서 조계현을 축 으로한 어제의 용사들이 다시 뭉쳐 41년 만에 재회를 했다. 대화가 무르익어갈 때 잠시후 서울에서 오는 3월 26일 서울 강남모처에 세계타이틀 획득 40주년을 기념행사를 앞둔 장정구 챔프와 호텔 인스라다 이천 박치순회장 장챔프 기념행사를 주관할 조은호관장이 조문객으로 방문 담화를 나눴다.

조계현 단장은 이날 동석한 복싱 대통령 장정구 챔프와 오래전 만난 인연이 있었다. 두사람 모두 자기분야에서 독보적인 위치를 선점한 금강석(金剛石) 같은 존재들이다. 장챔프를 보니 조계현 단장과 군산남중에서 함께 야구를 할적에 군산상고 선배들과 어우러져 학교 운동장에서 복싱글러브를 끼고 스파링을 한 지난날이 주마등처럼스쳐간다.

당시 타고난 쌈꾼 조계현은 복싱에도 상당한 소질이 있었다. 수양버들처럼 유연한 몸놀림에서 터지는 묵직한 일격을 지금도 기억하고 있다. 야구판에서 싸움닭이라 불릴정도로 특유의 승부사기질이 남달랐던 조계현이 복싱으로 전향했다면 박종팔 백인철과 함께 트로이카를 형성 한국 복싱 중량급의 한축을 담당했을지도 모를 일이다.

군산상고 재학시절 조계현과 함께 공수에서 활약했던 고장량은 농협 시절 실업 야구 연맹전에서 타격왕 2연패를 달성한 호타준족의 선수다.

90년 북경 아시안게임에 김기태 박정태 이종범 유지현과 함께 국가대표로 출전한 고장량은 익산에서 취미로 복싱을 몇 개월 수련을 한 복싱 매니아다. 그는 동료들 앞에서 쉐도우 복싱을 펼치는 퍼포먼스를 연출 웃음을 자아냈다. 

빅치순회장 장챔프 신준섭처장 조은호관장(좌측부터).
빅치순회장 장챔프 신준섭처장 조은호관장(좌측부터).

대한복싱협회 심판위원으로 재직 중인 국가대표 출신 김완수 곽동성(원광대) 두 전직 복서가 조문객으로 내방한다. 1958년 7월 군산태생의 곽동성은 천부적인 복싱 감각을 지닌 복서였다.

특히 동물적인 순발력을 이용한 타격은 전광석화같았다. 이런 주무기를 바탕으로 곽동성은 중앙무대에 진출 1977년 대한체육회 최우수 복서인 황철순(동국대)은 필두로 1981년 뮌헨 세계선수권 준우승자 김동길(한국체대) 1979년 세계군인선수권 금메달 김지원(수경사) 1975년 아시아 청소년 대회(필리핀) 우승자 한창덕(중산체) 1985년 김명복배와 제67회 전국체전 우승자 백승영(용인대) 1979년 김명복배 최우수복서 박광천(충북대)등을 차례로 꺽고 스타복서 킬러로 명성을 날렸다. 

야구 레전드 고장량과 조계현(좌측부터)
야구 레전드 고장량과 조계현(좌측부터)

1979년 세계 군인선수권(베네주엘라) 페더급에서 은메달을 획득한 김완수는 이곳에서 조계현과 무려 41년만에 드라마틱한 만남을 가졌다. 1981년 7월 10일 조계현이 미국 오하이오주에서 벌어진 제1회 세계 청소년 야구 선수권대회에 선동렬 김건우 강기웅등과 함께 선발되어 출전을 했다.

비슷한 시기에 수경사에 소속된 김완수도 오하이오주에서 개최된 제3회세계군인 선수권 대회에 출전을 했다. 그리던 어느날 김완수가 경기를 하기위해 복싱경기장을 향해 걸어가던중 우연히 길거리에서 조계현이 포함된 한국야구 대표팀과 마주친다.

그곳에서 복서 김완수가 동향인 조계현을 만나 짧은 몇마디 주고받다 헤어진 것이다. 김완수는 1978년 제2회 김명복 박사배를 비롯 아시아선수권 선발전 대통령배 전국체전을 싹쓸이 하면서 그해 4관왕에 오른 정통파 복서 였다.

1979년 7월 제31회 세계군인선수권 준결승에서 서독의 랑구토를 3회RSC로 잡고 결승에서 홈링의 홈링의 살자자르에 홈텃세에 밀려 준우승을 차지한 김완수는 1980년 대통령배 결승에서 케냐 골든컵 금메달리스트인 김인창에 패하고 복싱을 접었다 곽동성과 함께 은퇴후 교직생활을 하다 몇해전 정년 퇴임한 김완수는 국내 복싱인중 영어를 가장 유창하게 구사하는 복싱인으로 정평이 나있다. 

이철승관장 김완수교사 이용선관장 김현철회장(좌측부터).
이철승관장 김완수교사 이용선관장 김현철회장(좌측부터).

이날 식장에는 복싱사상 최초로 올림픽에서 금메달을 획득한 전북체육회 신준섭처장도 조문객으로 방문 호텔 인트라다 이천 박치순 회장과 장정구 챔프등과 인사를 나눴다.

신준섭은 1983년 나와 함께 전북대표로 대통령배 전국체전을 비롯 로마월드컵 최종선발전에 함께 출전한 복서다. 특히 8월에 동국대학에서 개최된 로마 월드컵 최종선발전 플라이급에 출전한 난 허영모와 대결을 앞두고 프로행을 위해 경기를 포기했다.

미들급에 출전한 신준섭은 우승을 차지했고 그우승을 전환점으로 10월에 개최된 월드컵 본선에서 김광선과 함께 금메달을 획득했다. 탄력을 받은 신준섭은 1984년 LA올림픽에서 복싱 사상 최초로 금메달을 획득 메이져 대회( 올림픽.월드컵.세계선수권) 2관왕을 차지하며 기염을 토한다. 그리고 그 누구도 이루지못한 세계대회 3관왕의 꿈을 이루기위해 1986년 미국콜로라도 스프링스에서 개최된 세계선수권대회에 출전 한다.

하지만 우승자인 독일의 헨리 마스케에 3ㅡ2로 분패 한국복싱 사상 최초로 그랜드 슬램(Grand slam) 달성을 놓쳤다. 되돌아보면 고등학교 2학년때 뒤늦게 복싱을 시작한 신준섭은 당시 원숙기에 접어든 소배원 조주연 김공근 최우진등 정상급복서들의 만만한 스파링 파트너였다.

그들에게 신인시절 일방적으로 난타당하면서 내구력에 심한 균혈을 가진 신준섭은 장래성이 보이지않는 평범한 복서였다. 그런 만신창이(滿身瘡痍)가 된 된 몸을 추스려 용기를 잃지않고 트레이닝에 매진 기력을 회복하면서 남원농고 졸업반인 1981년 학생선수권을 석권했다.

그러나 김명복 박사배와 전국체전에서 윤영복과 이해정에 결승에서 패한 신준섭은 성인무대에서도 이남의와 조용래의 견고한벽을 넘지못했다. 이런 수많은 패배와 실패를 통한 담금질이 훗날 명복서로 거듭태어난 원동력이 된다.

임태수 회장 장정구챔프 조은호관장(좌측부터).
임태수 회장 장정구챔프 조은호관장(좌측부터).

현역시절 신준섭의 훈련과정을 현장에서 지켜보면 문득 손자병법에 나오는 선승구전(先勝求戰)이란 글귀가 생각난다. 직역하면 먼저 승리를 확보하고 전쟁에 임하라 란 뜻이다.

이문구 처럼 신준섭은 이길 수 있는 전력을 만들때까지 자신의 잠재력을 최대한 끌어올리고 링위에 올랐던 복서가 바로 신준섭이다. 신준섭의 숨은 비화가 생각난다. 1982년 어느날 이었다. 당시 전북 대표팀이 훈련을 했던 체육관은 이리여고앞에 위치한 조석인 회장이 운영하는 전진관(轉進館)이란 복싱체육관이었다.

그 체육관 맞은편에 점방(店房)이있고 그 뒤편에 신준섭의 자취방이 있었다. 언젠가 우연히 자취방에 가보니 큼직한 호박이 하나 보였다.

당시 신준섭이 원광대학에 입학 축구를 하다 골절상을 당해 더 이상 뜀박질을 할 수 없는 현실에 쳐하자 방구석에서 앉아 큰호박을 들었다 놨다를 반복하면서 웨이트 트레이닝을 했던 것이다. 신준섭은 그런 멘탈을 지닌 투사였다.

조계현단장 원동희 서부복싱 회장 임종대 총무(좌측부터)
조계현단장 원동희 서부복싱 회장 임종대 총무(좌측부터)

신준섭 스토리는 조만간 정리해서 독자 여러분들에게 새롭게 선보일 예정이다. 끝으로 이번주 스포츠칼럼을 마무리하면서 수많은 조문객중에서도 제주도 서귀포복싱협회 김장섭사무국장과 대천에서 왕림한 대한복싱협회 오종서 심판위원  수도권에서 찾아오신 김병무 WBA 국제심판. 성남 월호텔 최용만 회장. 인스라다 호텔 이천 박치순회장. 잠원동 티롤 관광호텔 박종천 회장. 성남복싱 황기관장. 안산제일 김학명관장. 구리체육관 김민기 관장. SM 프로모션 홍성민회장과 김주원 관장. 서부복싱회 원동희 회장 임종대 총무를 비롯 조문하기위해 내방하신 모든분들게 이 자리를 빌어 다시한번 고개숙여 감사의 인사올린다.

조영섭기자는 복싱 전문기자로 전북 군산 출신으로 1980년 복싱에 입문했다. 

1963년: 군산출생
1983년: 국가대표 상비군
1984년: 용인대 입학
1991년: 학생선수권 최우수지도자상
1998년: 서울시 복싱협회 최우수 지도자상

현재는 문성길 복싱클럽 관장을 맡고 있는 정통복싱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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