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인박명(佳人薄命)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아름다운 사람은 운명이 기구(崎嶇) 하다.'라는 말입니다. 그러니까 아름다운 미인이나 재주가 뛰어난 사람이 기구한 운명에 처하거나 삶이 평탄하지 못한 경우를 두고 하는 말이지요.
지난 6월 16일 고(故) 주석중 서울아산병원 심장혈관 흉부외과 교수를 덤프트럭이 서울 송파구 풍납동 서울아산병원 패밀리타운 아파트 앞 교차로에서 주 교수와 부딪히는 사고가 발생해, 우리 시대의 아까운 인재가 스러졌습니다.
그야말로 ‘가인박명’일까요? 주석중 교수의 장남이 유족을 대표해서 올린 감사의 글이 심금(心琴)을 울려 함께 명복(冥福)을 빌어 봅니다.
【저는 고 주석중 교수의 장남 주현영 입니다.
여러분께서 따뜻한 위로와 격려로 저희와 함께해 주신 덕분에 아버지 장례를 무사히 마쳤습니다. 아무도 예상하지 못했던 이별이라 이루 말할 수 없이 슬프고 비통했지만, 정말 많은 분께서 오셔서, 아버지가 평소 어떤 분이셨는지 얘기해 주시고, 진심 어린 애도를 해 주셔서 가족들에게 큰 힘이 되었습니다.
장례를 마치고 며칠 후 유품을 정리하러 연구실에 갔었습니다. 방금 수술 복으로 갈아입고 나가신 것 같은 옷가지들과 책상 위 서류들과 몇 개의 메스와 걸려 있는 가운 등, 금방이라도 돌아오실 것 같은데, 다시 뵐 수 없음에 가슴이 미어졌습니다.
거기 쓰시던 책상 서랍 여기저기, 그리고 책상 아래 놓인 상자에 수도 없이 버려진 라면 수프가 널려 있었습니다. 제대로 식사할 시간을 내기도 어려워서, 아니면 그 시간조차 아까워서 연구실 건너 의국(醫局)에서 생 라면을 가져와 면만 부숴 드시고 수프는 그렇게 버려둔 것이 아닌가 여겨졌습니다.
오로지 환자 보는 일과 연구에만 전 심 전력을 다하시고, 당신 몸은 돌보지 않던 평소 아버지의 모습이 그대로 느껴져 너무나 가슴 아팠습니다. 정리되지 않은 채 뒤섞여 있는 서류들 속에는, 평소 사용하시던 만년필로 직접 쓴 몇 개의 기도 문이 있었습니다. 벽에 있는 작은 게시판에도 기도 문 한 장이 붙어 있었습니다. 영문으로 쓴 그 기도 문 한 구절은 이렇습니다.
<…but what can I do in the actual healing process? Absolutely nothing. It is all in God’s hands.>
‘정성을 다해 수술하고 환자를 돌보지만, 내 힘은 정말 아무것도 아니니, 신(神)께서 도와 주십사 간절히 기도하는 마음을 그렇게 적어두신 듯합니다.’
아버지 빈소가 마련된 첫날, 펑펑 울면서 찾아온 젊은 부부가 있었습니다. 갑작스러운 대 동맥 박리로 여러 병원을 전전하였으나, 어려운 수술이라며 모두 기피 하여 마음의 준비를 하고 있었는데, 저희 아버지께서 집도하여 새로운 생명을 얻었노라며 너무나 안타까워하시고 슬퍼하셨습니다.
아무리 위험한 수술이라도 ‘내가 저 환자를 수술하지 않으면, 저 환자는 죽는다는 생각이 들면, 내가 감당해야지 어떻게 하겠느냐’ 라고, ‘확률이나 데이터 같은 것이 무슨 대수냐’고 그러셨던 아버지 말씀이 떠올랐습니다.
아버지께서는 너무나 힘들고 긴장되고 시간도 오래 걸리는 심장 수술에 정성을 다해 도와주신 많은 분께 늘 고마워하셨습니다. 마음을 말로 표현하는 데 능한 분이 아니셔서, 아버지의 진심이 전해지지 못했다면, 이렇게나마 아버지의 뜻을 전해 드리고 싶습니다.
아버지께서 돌아가시기 얼마 전 어머니께 뜬금없이 이런 말씀을 하셨답니다. “나는 지금껏 원 없이 살았다. 수많은 환자를 수술해서 잘 됐고, 여러 가지 새로운 수술 방법도 좋았고, 하고 싶은 연구 하고, 쓰고 싶었던 논문 많이 썼다. 신께서 내려주신 소명을 다한 듯하여 감사하고 행복하다.”
마치 당신의 운명을 예감 아닌 예감이라도 하셨던 것일까요? 저희는 아버지의 자취가 너무나 그리울 것 같습니다. 많은 분께서 저희 아버지를 누구보다 따뜻하고 순수한 가슴을 지닌 사람으로 기억해 주셨습니다. 여러분이 기억해 주신 아버지의 모습과 삶의 방식을 가슴에 새기고, 부족하지만 절반 만이라도 아버지처럼 살도록 노력하겠습니다.
다시 한번 귀한 걸음 하셔서 아버지 가시는 길 배웅해 주시고, 위로해 주신 데 대해 깊이 감사드립니다. 감사합니다. - 유족을 대표하여 주현영 올림-】
어떻습니까? 얼마나 훌륭하신 분인가요? 다시 한번 삼가 조의(弔意)를 표합니다. 그렇습니다. 어쨌든 한 분야에 열과 성(熱誠)을 다 기울여, 한 분야에 큰 업적을 쌓으신 분은 세상의 존경을 한 몸에 받으실 만한 분이실 것입니다.
雙頰凝酥髮抹漆/ 眼光入簾珠的皪/ 故將白練作仙衣/ 不許紅膏汚天質/
吳音嬌軟帶兒癡/ 無限閑愁總未知/ 自古佳人多命薄/ 閉門春盡楊花落
「두 뺨은 우유가 뭉친 듯 머리는 옻 칠한 듯/ 눈빛이 발에 드니 눈동자 옥 구슬처럼 빛나/ 흰 비단으로 선녀 옷 지었더니/ 본 바탕 더럽힐까 봐 연지도 안 발랐구나/ 교태 섞인 오나라 아이처럼 가녀려도/ 끝없는 근심은 결국 알지 못해/ 예로부터 미인은 명이 박하다 했지/ 문 닫히고 봄 날 가니 버들꽃 떨어지네」
박명가인(薄命佳人)! 당송팔대가(唐宋八大家) 소식(蘇軾 : 1036~1101)이 이 시를 읊었습니다. ‘산 중에 들어와 비구니가 된 어린 여승의 애처로운 모습을 그린 시에서 ‘가인박명’이 나왔다고 하네요!
단기 4356년, 불기 2567년, 서기 2023년, 원기 108년 7월 14일
덕산 김덕권(길호) 합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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