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는 젊어서 변변치 못한 실력을, 가지고 국내는 물론 전 세게 웬만한 원불교 교당엘 찾아가서 신앙 수행담에 관한 강연을, 한 적이 많습니다. 그런데 강연을 마치고 나설 때는 여러 가지로 만족할 때가 별로 없었지요.
강연을 하느라고 열변을 토했는데도 모든 것이 늘 부족했습니다. 아마 인생살이 거의 전반이 그런 것 같네요. 학창 시절에도 저는 머리가 나빠서인지 남들처럼 공부도 잘못했습니다. 그런 머리와 능력을, 가지고 한때 프로 권투 판에 뛰어들어 험한 사각의 정글을 누비기도 했지요. 하지만 여기도 마찬가지였습니다.
못된 짓, 험한 꼴을 다 겪고 나서야 비로소 불연(佛緣)이 깊었든지 원불교에 귀의(歸依)하여 일직 심, 한 길로, 원(願)도 없고 한(恨)도 없이 마음껏 달려 오늘에 이르렀습니다. 그렇습니다. 그렇게 지성여불(至誠如佛)의 정신으로 신앙과 수행, 주어진 직분에 대과 없이 달릴 수 있었던 것은, 바로 이 저의 부족함과 불완전함을 인정하고 받아들였기 때문에, 가능했던 것 같습니다.
완벽할 수 없는 게 인간이고, 인생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힘든 내 삶을, 자신의 여건을 받아들여야 합니다. 바꿀 수 있는 게 아니라면, 현재에 만족하며 살 수밖에 없습니다.
저의 첫 번째 신앙 · 수행 수필집의 제목이 <진흙 속에 피는 꽃>입니다. 연못의 물이 맑으면, 3~4cm 크기의 연꽃이 피지만, 연못의 물이 질퍽하게 더러워져 있으면, 최고 크기 20cm까지의 연꽃이 핀다고 합니다. 그러니까 우리의 삶이 어려울수록 더 큰 성공을 할 수 있다는 의미이기도 하지요.
머리 좋은 사람, 잘생긴 사람, 집안 좋은 사람, 능력 있는 사람 등등, 모두 부러워하지 말고, 받아들여야 할 대상입니다. 어쩌면 반대로 나를 부러워하는 사람도 많을 수도 있음을 알아야 합니다. 우리가 보기에는 모든 것을 다 가진 것 같은 사람도 사실은 완벽하지 못하고, 불완전하고 부족함이 있을 것입니다.
나의 모자람을 인정하고 꾸준히 노력하는 사람이 결국 승리합니다. 불완전함을, 자신의 부족함을 인정하고 이겨나가야 성공한 인생을 누릴 수 있지요. 이렇게 내가 완전할 수 없는 것처럼, 남도 완전할 수 없음을 알아야 합니다.
친구 관계도 이것에 해당하는 것 같습니다. 남이 내 맘에 들지 않을 때, 남을 바꾸려 하지 말고, 내가 남을 이해하고 받아들여야 합니다. 남의 허물을 보며, 내 허물에 대해서 반성하는 것입니다. 세상사의 정치, 경제, 문화, 인간관계 등에서, 옳고 그름을 따지기보다는 그 다름을 받아들이는 것이 중요하지요.
왜냐하면 사실 우리는 옳고 그름을 잘 모르기 때문입니다. 사실 옳고 그름이 없을 수 있으므로, 모두 받아들여야 할 대상이 되지 않을까요? 실제로 옳고 그름은 자신의 관심 영역일 뿐, 영향력의 영역 내에 있지 않은 경우가 더 많기 때문입니다.
불교에서는 석가가 가르치는 삶의 8가지 고통 가운데, ‘만나기 싫은 것을 만나야 하는 고통’이 있습니다. 마음에 들지 않는 사람과 같이 살아야 하는 고통이 여기에 해당하겠지요. 그런데 이 고통도 내가 변하고, 마음에 들지 않는 사람을 내 마음 안에서 받아들이고 이해해서, 싫어하는 것들이 없어지면, 그때부터 우리는 즐겁고 행복한 삶을 살 수 있을 것입니다.
불가(佛家)에서 말하는 삶의 8가지 고통은 <생고 · 노고 · 병고 · 사고(生苦·老苦·病苦·死苦> 네 가지 고통과 <애별이고(愛別離苦)> <원증회고(怨憎會苦)> <구부득고(求不得苦)> <오음성고(五陰盛苦)>를 더해 팔고(八苦)라 합니다.
그러니까 앞의 생·노·병·사 네 가지 고통과 다섯째가 좋아하는 것을, 떠나보내야 하는 고통, 여섯째가 만나기 싫은 것을, 만나야 하는 고통, 일곱째가 얻으려 해도 얻지 못하는 고통, 여덟째가 몸과 마음에서 일어나는 고통이라고 하는 것이지요.
첫째의 생 고도 우리가 언뜻 생각해 보면, 태어나는 것이 어떻게 괴로움일까 싶지만, 가만히 생각해 보면, 생이야말로 ‘노병사(老病死)’의 직접적인 원인이 된다는 것을, 알 수 있지요. 즉, 태어나기 때문에 존재의 모든 괴로움이 시작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불가에서는 업(業)에 의해 태어나는 여섯 가지의 세계, 즉, 육도(六道)를 언급하면서, 정각(正覺)을 얻는다는 것은 곧, 육도윤회의 끊임없이 돌고 도는 수레바퀴에서 벗어나는 것임을 설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은 다시 말해 끊임없이 업에 따라 육도에서 태어나고 죽는 반복적인 윤회의 수레바퀴 속에서 이제는 다시는 태어남을 받지 않는, 육도를 완전히 초월한 경지를 바른 깨달음, 정각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고통의 근본적인 원인은 집착이며, 집착을 벗어날 때 즉, 욕심을 버릴 때 고통은 사라지는 것이지요. 집착에서 벗어나기 위해서, 욕심을 버리기 위해서 구도자가 수행을, 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진리를 깨닫기 위해 수행을 하는 것도 결국 행복을 얻기 위한 것이 아닐까요?
마음에 안 드는 이러한 것들에 대해서 참고 살면 고통이지만, 이해하고 욕심을 버리고 받아들이면 고통이 아니고 무심할 수 있습니다. 매일 반복되는 일상을 어떤 태도로 대하느냐에 따라서, 우리는 더 나은 선택을 할 수도 있고, 좋은 사람과 좋은 일이 함께 찾아옵니다.

세상에 완벽한 것은 없습니다. 먼저 감사하는 마음을 가지시고, 모든 일에 긍정적이고, 적극적이며, 정열적으로 뛰면, 우리 주변부터 따뜻하게 변할 수 있지 않을까요!
단기 4356년, 불기 2567년, 서기 2023년, 원기 108년 7월 18일
덕 산 김덕권(길호) 합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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