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김종원관장을 만나기 위해..
지난 5월 105회 전국체전 선발전 63.5Kg급 에서 우승한 서울체고 3학년에 재학중인 이민재 선수와 그의 은사인 서윤복 복싱코치가 필자의 체육관을 방문 담화를 나눴다. 서 코치는 올 3월 자신의 모교인 서울체고에 지도자로 입성 4월 청양에서 개최된 종별선수권대회에서 김종석 선수를 우승시키면서 지도력을 검증받았다.

서윤복 코치는 이민재는 찬스 포착이 뛰어나고 복싱 센스가 탁월 본선에서 강력한 금메달 후보라고 역설했다. 청소년대표 출신으로 스트레이트가 주무기인 이민재는 올해 몽골과 카자흐스탄에서 개최된 청소년대회에 한국대표로 출전했다. 특히 몽골에서 개최된 대회에서 동메달을 획득 주목을 받았다. 용인대에 진학이 확정된 이민재 선수가 본선 에서 유종의 미를 거두길 기대한다.

지난 주말 오는 7월 27일 생활 체육대회가 개최되는 경기도 남양주시 퇴계원으로 향했다. 경기도 복싱협회 사무국장을 겸직하면서 이곳에 한국체대 복싱체육관을 운영하는 김종원 관장을 만나기 위해서였다.
# 김종원 관장의 권투 이야기
그럼 이번 생활 체육대회를 주최한 입지전적(立志傳的)인 인물 김종원 관장의 라이프 스토리(Life story)를 시작해보자. 1962년 이 고장 출신의 김종원은 1976년 퇴계원 중학 3학년때 경흥 체육관(관장 윤창수)에 입관 복싱을 수학한다. 1977년 마석 신석고에 입학한 김종원은 체계적으로 훈련을 받지 못해 별다른 두각을 나타내지 못한다, 그때 김종원은 한영고 출신의 장흥민의 오작교(烏鵲橋) 역활로 이듬해인 1978년 한영고에 2학년으로 편입 웅비(雄飛)의 나래를 펼친다. 1957년 서울태생의 장흥민(한국체대)은 1979년 제1회 뉴욕 월드컵 1980년 모스크바 올림픽에 국가대표로 선발된 톱 복서였다.

양행석 감독이 지휘봉을 잡은 한영고 출신의 선두주자는 라이트 플라이급의 박찬희였다. 1974년 테헤란 아시안게임 금메달에 이어 1976년 킹스컵대회 최우수상을 받으면서 명성을 날리자 바통을 이어받은 1년 후배 김인창이 1976년 대통령배와 학생선수권대회 라이트급에서 2관왕을 차지한후 1978년 방콕아시안게임 라이트 웰터급 금메달 1979년 제1회 뉴욕월드컵 은메달 케냐에서 개최된 골든컵 금메달 LA시장배 금메달을 획득 국제대회 3관왕을 이룩한다.

걸출한 두 복서의 맹활약에 힘입어 일순간에 한영고는 복싱 명문고로 급부상한다. 김종원이 1978년 한영고 2학년에 편입했을 때 김인창은 한국체대 2학년이었다. 김종원은 하늘 같은 선배 김인창을 처음 보는 순간 에베레스트산보다 더 높고 웅장하게 느껴졌다고 회고했다.
한영고에 편입 김남수 사범의 본격적인 트레이닝을 받으면서 김종원은 잠자던 포텐(Potential)이 활화산처럼 폭팔한다. 간절하게 강을 건너고 싶은 김종원에게 기꺼이 배(舟)가 되어준 1953년 전남 무안 출신의 김남수는 빼어난 지도력으로 정평이 난 트레이너다.

김 사범의 지도력을 발판으로 일취월장한 김종원은 발레리나같은 스텝에서 뿜어져 나오는 칼날 같은 스트레이트를 주무기로 상대를 압도한다. 그리하여 2년 동안 각종 선발전에 출전 당대 최고의 복서들인 이윤희(목포 덕인고) 김성길(숭덕공고) 송미가열(이리상고) 신창석(천호상전) 권채오(안흥공전) 권달원(부산체고)등 역대급 복서들과 3승 3패의 균형을 이룰 정도로 최상급(最上級) 실력을 과시하며 급성장을 한다.
# '김종원의 성실함..'
1981년 김종원은 한국체대에 특기생으로 입학한다. 전일선 이봉래 신귀항 김창렬 이성희 김성길등이 동기생이다. 그러나 김종원은 입학 초기에 불의의 허리 부상을 입는다. 그리고 체중이 불어 2체급 월장 밴텀급으로 출전한 대학선수권대회에서 파죽의 3연승을 거두고 결승에 진출 했지만 윤영환(동국대)의 견고한 벽에 막혀 은메달에 머문다. 김종원을 꺽은 윤영환은 대회 최우수복서(MVP)에 선정되었다. 1985년 대학을 졸업한 김종원은 서울 성사중에서 임시교사로 수개월 봉직하다 군입대를 한다,
1988년 군 복무를 마친후 가장 높이 날기 위해서는 가장 낮은 곳에서 출발해야 한다는 현인(賢人)들의 말처럼 그는 생수 배달부터 시작한다. 그때 그는 하면 된다가 아니라 해야 된다란 적극적인 자세로 무장하고 업무에 몰입한다. 그리고 김종원은 1년후 전국 생수 판매량 1위를 기록하면서 그 분야에서 아무도 자신의 경쟁자가 될수 없음을 똑똑하게 보여주면서 월평균 6백만원의 수익을 창출(創出) 반석위에 우뚝선다. 당시 필자가 88체육관(관장 김철호)에서 25만원의 급료를 받고 있음을 상기(想起)해 볼때 그는 엄청난 금액을 그는 수령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렇게 5년을 생수 배달업에 종사 비약적인 발전을 이룩하면서 악착같이 모은 종자돈(2억)으로 결혼과 함께 인근에 39평 APT를 매입했고 퇴계원 역(驛) 앞에 고풍(古風)이 감도는 한국체대 복싱체육관을 설립한다.
체육관 운영도 생수 배달할 때처럼 흔들림 없는 강철같은 의지로 재무장하면서 투신(投身) 생 수업에 종사할 때보다 더 많은 수익을 창출 이를 바탕으로 1남 1녀를 모두 대학을 졸업시켰다. 현재 두 자녀 수사관과 축구강사로 안정되게 취업 생활하고 있다. 자식 농사도 성공한 집안의 가장이자 경제독립을 이룩한 체육인으로 거듭 태어난 것이다. 김주난 작가는 경제적자유인의 특징 3가지를 꼽았다. 첫째 안전지대에 머물지 않는다. 둘째 내일 죽을 것처럼 오늘을 적극적으로 산다. 셋째 비바람을 견디어내면서 극기(克己)하면서 생존한다고 말했다. 한편 중국 알리바바의 창시자인 마윈 회장은 역설적(逆說的)으로 경제적 독립에 실패한 사람들을 오랫동안 연구 분석한후 다음과 같이 말했다. 빈곤(貧困)의 시작은 마음에서부터 출발한다. 즉 모든 것은 모든 것이 마음먹기에 달렸다는 일체유심조( 一切唯心造)를 강조했다.
그는 가난한 자들의 특징은 자유를 주면 함정이라고 생각하고 작은 사업을 하자고 하면 돈을 별로 벌지 못한다고 한다. 큰 사업을 하자고 하면 돈이 없다고 말하고. 새로운 사업을 시도해 보라고 말하면 경험이 없다고 한다. 상점(商店)을 같이 운영 하자고 하면 자유가 없다고 말하고 신규 사업을 시작 하자고 하면 전문성이 없다고 말한다.

그러나 김종원 관장은 이와 상반된 신념으로 자신이 선택한 직업에 헌신적으로 몰입하면서 방망이를 힘차게 휘들러야 삼진이든 홈런이든 결과물이 나온다는 평범한 진리를 가슴에 품고 사업에 임했다. 김종원 관장은 성공의 반대는 실패가 아닌 포기라고 말하면서 끈질긴 오뚜기 정신으로 지난날을 살아왔다고 회상했다. 김종원 관장은 삶의 풍파(風波)에 정면으로 대응 경제독립에 성공한 자랑스런 복싱인이다. 그에게 앞으로 주어진 목표를 묻자 그는 앞으로 체육관에서 창출된 이윤을 주변 이웃들과 나눔과 배품을 몸소 실행하면서 소박하게 살고 싶다고 말한다. 변함없는 그의 건승을 바란다.
조영섭 복싱전문기자는 1980년 복싱에 입문했고 현재 문성길 복싱클럽 관장을 맡고 있는 정통 복싱인이다. 1963년: 군산출생 1983년: 국가대표 상비군 1984년: 용인대 입학 1991년: 학생선수권 최우수지도자상 1998년: 서울시 복싱협회 최우수 지도자상 2018년 서울시 복싱협회 부회장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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