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더위가 기승을 부리던 지난 주말 올해 새롭게 전북복싱협회 심판장에 임명된 이철승 위원장을 취재하기 위해 전주시 완주군 소양면에 위치한 전북체고로 향했다.
때마침 이철승 위원장의 모교인 전북체고에서 105회 전국체전 최종선발전 경기가 진행되고 있었다. 1963년 4월 3일 익산태생의 이철승은 중학 시절 훤칠한 키에 탄력있고 유연한 피지컬을 바탕으로 당초 전도유망한 기계체조 선수로 활약했다.

그러나 중학 졸업 후 개인적인 사정으로 1년 유급한 이철승은 1980년 전북체고에 입학하면서 복싱으로 전환해 전북복싱의 대부 조석인 회장과 박남철 사범의 지도를 받았다.
체조를 통해 구축한 펀더멘탈을 바탕으로 복서로 성장한 이철승은 1981년 전북체고 2학년 때부터 유망주로 주목받는다. 당시 전북체고는 이철승을 비롯, 최봉호 유갑식 이재연 안병화 김정곤 정점용 최봉현 김공근 등 일당백 복서들이 포진한 최강의 팀이었다.
그해 겨울 유관희 교사가 지휘봉을 잡고 있던 대전체고팀이 전북체고 복싱팀과 평가전을 갖기 위해 방문했다.

당시 대전체고 라이트 헤비급에는 국내 랭킹 1위 임한철이라는 정상급 복서가 나서 이철승과 평가전을 펼쳤다. 임한철은 후에 아시아선수권과 서울 월드컵에 헤비급 국가대표로 출전한 정통파 복서였다. 이대결에서 이철승은 무적함대 임한철을 2회에 스커드미사일처럼 묵직한 라이트 카운터을 연달아 날려 침몰시키는 대이변을 연출한다.
이 경기에서 주심을 맡았던 박남철 사범은 잠재력이 풍부한 이철승의 성장 가능성을 주목하고 집중적으로 맹훈련을 시킨다.
이철승이 전북체고 졸업반이었던 1982년 4월 부산 구덕체육관에서 제6회 김명복 박사 배 대회가 열렸다. 이 경기에서 전북체고는 미들급에 최봉현, 라이트 헤비급에 이철승, 헤비급에 정점용이 출전했다. 이철승은 파죽의 4연승(3KO)을 거두고 대회 우승을 차지하며 최우수선수상(MVP)을 받았다. 당시 헤비급에선 그의 숙적 김한철이 체급을 올려 전북체고 정점용을 잡고 우승했다.
같은해 7월 잠실학생체육관에서 제32회 학생선수권대회가 열렸다. 이 대회에서 물이 오를대로 오른 이철승은 파죽의 3연승 (2K0)승을 거두고 라이트 헤비급에서 우승하며 전국대회 2관왕을 달성한 뒤 한국체대 진학을 예약한다.
이철승은 작은 아버지가 아마복싱계 거물급 인사인 이홍대 선생이다.
1941년 익산태생의 이홍대 선생은 전북복싱의 대부 조석인 회장의 수제자로 1963년 제 44회 전국체전 1966년 제47회 전국체전에서 우승 초창기 전북복싱을 대표하는 복서였다.
현역에서 은퇴를 한후에는 1984년 10월 핀란드 국제복싱대회에 한국대표팀 감독으로 참가, 금메달 4개(서정수 고희룡 주윤상 박제석)를 획득하며 한국팀이 종합우승을 차지하는데 견인차 역할을 했다.
이런 관록을 가진 이홍대 선생은 2차례에 걸쳐 대한복싱협회 심판위원장을 지내면서 1990년 2월 호주 시드니에서 개최된 제12회 국제 아마복싱연맹 총회에서 국제심판 자격증을 취득, 각종 국제대회에 한국을 대표해 참가하며 명성을 얻었다
1983년 한국체대에 진학한 이철승은 이듬해에 개최되는 LA 올림픽 라이트 헤비급에서 김유현 곽귀근 홍기호와 함께 4각 편대를 형성, 각축전을 펼칠 것으로 예상되었다,
그러나 1984년 국가대표 상비군에 선발된 이철승은 5월 어느날 한국체대에 전지훈련을 위해 방문한 모교 전북체고 체조팀을 만난 자리에서 반가운 마음에 그들 앞에서 철봉을 잡고 시연을 펼치다 그만 손목이 골절되는 부상 을 당한다.
그리고 같은해 대구에서 개최된 제14회 대통령배 대회에 출전 결승에 진출 했지만 부상이 재발 중도에 경기를 포기하면서 사실상 복싱을 접는다. 이후 '밤의 세계'로 빠졌던 그는 대학졸업반인 1986년 대형사건을 일으켜 커다란 진통을 겪는다.

사건 후유증으로 그는 학교를 휴학하고 1992년 서울 당곡고에서 신귀항 교사의 추천으로 복싱선수들을 지도한다. 자상한 성품을 지닌 그는 당시 당곡고 유망주 지인진을 자택에서 함께 기숙 친동생처럼 그를 보살피면서 육성시킨다.
이를 발판으로 지인진은 당시 밴텀급에서 대전체고 고교 랭킹1위 임재환과 자웅을 겨룰 정도로 급성장해 보은한다. 당시 당곡고 체육교사 신귀항은 이철승을 향해 "지인진 복싱을 비로소 완성 시킨 지도자"라고 격찬했다.

1993년 지인진이 졸업하자 자연스럽게 이철승은 당곡고에서 지도자 생활을 접는다. 그는 1983년 입학한 한국체대에서 무려 13년이 지난 1996년에 이르러 비로소 졸업장을 받는등 소설 속에 나올 것 같은 파란만장한 인생을 경험한다. 이철승은 지금의 아내를 만나면서 드디어 긴 방황에 마침표를 찍는다.
이를 계기로 두 달간 두문불출하면서 외부와 접촉을 차단한 이철승은 결혼과 함께 아내의 고향인 충남으로 내려가 평범하게 지낸다.
그리고 2015년 그는 제2의 고향 전주에 정착해 덕진공원 정문 맞은 편에 복싱체육관을 설립하며 후진 양성에 몰입한다, 송충이는 솔잎을 먹고 살아야 한다는 평범한 진리를 충남 연무대에서 칩거 생활을 하면서 절실히 깨닫고 행동에 옮긴 것이다.

이곳에서 큰딸 이솔희(1997년생) 양에게 복싱을 지도했고 그녀는 경북체고 재학시절 전국 무대에서 발군의 실력으로 두각을 나타내면서 국가대표상비군에 발탁돼 부전여전을 실증해 보인다.
장남 이도영(1994년생)군은 191Cm의 큰키를 바탕으로 야구 명문 군산상고에 이동석 감독의 조련을 받으면서 팀의 에이스로 맹활약, 스포츠 집안으로 유명세를 크게 떨쳤다.
올해 28세인 이솔희 양은 올해 결혼과 함께 창업에 성공, 2곳에 대리점을 확장 운영하면서 이철승 심판위원장의 마음을 흐믓 하게 하고 있다.
돌이켜보면 이철승 심판위원장이 활약한 전북복싱은 지난날 수많은 스타 복서들을 배출 한국 아마복싱의 중심축을 형성한 지역이다.
1965년 제2회 아시아선수권대회에서 전북 군산팀은 서상영 황영일 박구일등 3명이 금메달을 목에 걸면서 전북복싱 부활의 신호탄을 쏘아 올린다.
이를 발판으로 그들을 발탁 조련한 김완수 감독은 1969년 국가대표 코치로 발탁되면서 대한민국 체육상을 받았다.
바통을 이어받은 전북 익산체육관 조석인 관장은 이홍대 선수를 시발점으로 이거성 조영철 유종만 강월성 김운석 박남철 소배원 최우진 신종관 신준섭 조규남 고요다 송학성등을 화수분처럼 배출 전북복싱의 위상을 드높혔다.
군산체육관 김완수 관장도 김만호 김상돈 곽동성 김현호 김의진 황동룡 전진철 김장섭 오영호 강형석등 국가대표급 선수들을 배출, 용호상박 난형난제의 균형을 이루었다.
그러나 이후 전북복싱은 시나브로 내리막길을 걷고 있다.
전북복싱은 제99회 전국체전에서 종합준우승을 차지하면서 반짝 반등의 기회가 찾아왔지만 이를 살리지 못하고 프로야구판의 한화와 롯데팀처럼 하위권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딱한 현실이다.

이런 현실을 반증이라도 하듯이 현재 전주시에는 복싱팀을 전문적으로 운영하는 팀이 고작 2개의 팀(전주서중 전북체고)에 불과하다.
올해부터 전북 복싱협회 심판장이란 막중한 직책을 맡은 이철승의 어깨도 한층 더 무거울수 밖에 없는 긴박한 상황이다. 팀의 리더는 둥근면과 함께 서슬시퍼런 날카로움도 있어야 한다. 그래야 재대로 평가를 받는다.
과거의 찬란한 전북복싱의 영화(榮華)을 재현하기 위해 물러날 곳이 없는 벼랑 끝에 서 있는 절박한 장수의 심정으로 심혈을 기울이는 이철승 전북 복싱협회 심판위원장의 건승을 바란다.
글쓴이 조영섭 복싱전문기자는 1980년 복싱에 입문했고 현재 문성길 복싱클럽 관장을 맡고 있는 정통 복싱인이다. 1963년: 군산출생 1983년: 국가대표 상비군 1984년: 용인대 입학 1991년: 학생선수권 최우수지도자상 1998년: 서울시 복싱협회 최우수 지도자상 2018년 서울시 복싱협회 부회장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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