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주말 필자는 70년대 L.웰터급에서 '브레이크 없는 탱크'란 닉네임으로 활약한 복서 유흥석을 취재하기 위해 그가 체육관을 운영하고 있는 수원시로 향했다. 1956년 수원태생의 유흥석은 L. 웰터급에서 국가대표로 활약한 후 프로로 전향 WBA 라이트급 7위에 랭크된 선이 굵은 강타자였다.

유흥석은 유소년시절부터 철봉과 평행봉에서 탁월한 재능을 보이면서 소년장사로 불렸다. 이런 탄탄한 기초체력을 바탕으로 수원 복싱 체육관에 입문한 유흥석은 1978년 2월 제2회 세계선수권(유고) 2차 선발전 라이트 웰터급 결승에서 김상돈(한국체대)에 2회 KO승을 거두고 언론의 주목을 받는다.
그해 7월 제8회 방콕아시안게임 최종선발전에서 유흥석은 맞수 김인창(한국체대)과 맞대결한다. 그러나 경쾌한 스탭에서 뿜어내는 김인창의 송곳같은 잽과 미사일처럼 발사되는 카운터에 포인트를 빼앗기면서 판정패를 당한다.
'정밀기계'라 불리던 김인창은 아마추어 복싱에 특화된 복서였다. 9월 제8회 대통령배 대회에서 전남 대표 신항호를 RSC로 꺽고 우승을 차지한 유흥석은 그해 10월 59회 전국체전 준결승전에서 강력한 우승 후보 김선길과 맞대결한다.

부산 대표 김선길(한국체대)은 국가대표 황정한과 서인석을 꺾고 78년 유고 세계선수권대회 2차 선발전에서 우승한 강력한 금메달 후보였다. 이대결에서 유흥석은 팽팽한 대접전 끝에 김선길에 판정승을 거둔다. 결승전에서 유흥석은 전북 대표 박남철(원광대)을 꺾고 우승을 차지한다.
박남철도 최충일(대우개발)을 꺾을 정도로 출충한 실력을 보유한 복서였지만 유흥석 의 함포사격에 침몰하고 말았다. 1979년 2월 문화체육관에서 제5회 킹스컵 국가대표 선발전이 열렸다. 웰터급에 출전한 유흥석은 결승전에서 조용래(경남대)에게 2회까지 스트레이트 펀치를 허용 고전했으나 3회 적극적인 타격전을 펼치면서 무섭게 몰아부쳐 3ㅡ2 판정승을 거두고 우승을 차지했다.
유흥석에 패한 조용래는 1976년 마산공고 3학년때 대통령배와 전국체전을 휩쓸며 2관왕을 차지한후 그해 12월 국가대표 선발전에서 6년 동안 대표팀 부동의 간판 복서로 활약한 박태식을 꺾은 강자였다. 조용래는 78년 미들급으로 월 장 방콕아시안게임 선발전과 80년 모스크바 올림픽 선발전에서 이남의 라경민을 차례로 잡고 국가대표로 발탁된 풍운아였다.
열악한 사설체육관에서 복싱을 수련한 유흥석이 조용래 김선길 박남철등 엘리트 복서들을 꺾은 사실은 높이 평가할만한 업적이라 할 수 있겠다.

그 해 3월 26일 태국 방콕에서 제5회 킹스컵 대회가 개최되었다. 이때 한국은 18명의 대표팀을 구성 파견하였다. 웰터급에 선발된 유흥석은 원래 체급인 L웰터급으로 출전 16강전에서 강력한 우승 후보인 홈링의 실라몽콜과 대결에서 전매특허인 압도적인 화력을 뿜어내면서 완승을 거두고 8강에 진출한다.
8강전 상대는 양설석 (수경사)이었다. 그러나 2회전이 시작되자 유흥석 코너에서 타올을 던져 유흥석의 기권패 (RET)패가 선언된다. 유흥석은 참담한 심정으로 고개를 숙였다. 본인의 의사와 무관하게 타의에 의해 승패가 갈린 것이다. 그날 한국복싱은 김명환과 양설석 두 사람만 준결승에 진출했고 나머지 16명은 봄바람에 꽃잎 떨어지듯이 전원 예선에서 탈락한다.
여담이지만 그 대회 에서 유흥석과 함께 가장 억울한 판정패를 당한 희생자가 또 있었다. 페더급에 국가대표로 출전한 정교한 테크니션 전학수다. 전학수는 한창덕 이거성 백종우 강우영 박태국 유인봉등 역대급 복서들을 제압하고 국가대표에 발탁된 금메달 후보였다.
그러나 본선 1회전에서 전학수는 홈링의 위로조 시와파(태국)에 한템포 빠른 공격으로 시종일관 우세한 경기를 펼쳤지만 지독한 텃세에 밀려 3ㅡ2 판정패를 당한다. 전학수를 꺾은 시와파는 우승과 함께 대회 최우수선수(MVP) 선정된다. 결국 유흥석 전학수를 포함 18명의 국가대표 선수들은 제5회 킹스컵 대회에서 단 한 개의 금메달도 획득하지 못하고 쓸쓸하게 귀국길에 올랐다.

그 대회를 끝으로 아마복서 생활을 청산한 23살의 유흥석은 1979년 10월 23살의 세기 프로모션 (대표 서순종) 소속으로 장충체육관에서 가나 복서를 상대로 프로 대뷔전을 펼쳐 1회 KO승으로 제압, 신고식을 치른다.
그리고 1980년 4월 13일 한국 J.웰터급 타이틀에 도전 챔피언 김종호를 상대로 강력한 파상공격을 감행 10회 판정승을 거두면서 단 3전 만에 국내 정상에 오른다. 1954년 양주 출신의 김종호는 1975년 7월 진충문을 꺾고 국내 정상에 오른 후 5년 동안 치른 7차례 방어를 전부 KO로 장식한 사우스포 강타자였다.
5월 18일 유흥석은 11전 8승(2KO) 3패를 기록한 이동복 (극동)을 상대로 1차 방어전을 펼쳤으나 접전 끝에 10회 판정패를 당한다. 국내 타이틀을 획득 한지 단 35일 만에 벨트를 푼 것이다. 그해 10월 전열을 추스린 유흥석은 8전 5승(1KO) 3패를 기록한 중견복서 김용대(원진체)와 대결, 10회 무승부를 기록한다.
국가대표를 지낸 천하의 유흥석도 국내 랭킹복서와 대결에서는 쉽게 승전보를 울리지 못할 정도로 당시 한국복싱의 선수층이 두터웠다. 참고로 한국복싱 백년사에서 아마추어 국가대표 출신으로 프로복싱 세계정상에 오른 복서는 단 5명( 김기수, 문성길 .김지원, 변정일, 조인주)에 불과하다.

1981년 2월부터 유흥석은 14개월 동안 8차례 국제경기를 펼쳐 파죽의 8연속 KO승 퍼레이드를 펼치면서 1982년 5월 WBA 라이트급 7위에 등극 비로소 진정한 실력을 인정받는다. 당시 WBA 라이트급 챔피언은 레이 붐붐 멘시니(미국) 였다. 이때 유흥석의 매니져인 서순종 회장은 맨시니측과 접촉, 유흥석의 타이틀 도전은 시나브로 가시화된다.
그러던 어느날 세계랭커 유흥석은 장태일과 스파링을 하다가 오른손에 치명적인 큰부상을 당한다. 병원에서는 유흥석에게 선수 생활 불가 판정을 내렸지만 세계타이틀에 도전하고 싶은 불타는 야망을 꺽을 수 없어 유흥석은 그해 9월 이마모도와 부상을 무릅쓰고 세계타이틀 전초전을 벌인다.
그러나 부상 후유증을 극복하지 못하고 졸전을 펼친 끝에 10회 무승부를 기록 그의 세계타이틀전 도전은 연기처럼 사라지고 도전권은 동양 라이트급 챔피언 김득구 에게 자연스럽게 넘어간다.
유흥석의 전언에 의하면 세기 프로모션 서순종 회장이 김득구 매니저인 동아 프로모션 김현치 회장의 현역시절 매니져를 담당 평소 각별한 사이였다고 한다. 그런 인연으로 1982년 11월 김득구와 맨시니와의 WBA 라이트급 타이틀전이 성사되도록 서순종 매니저가 징검다리 역할을 해 주었다고 한다. 그때 만일 유흥석이 맨시니가 보유한 WBA 라이트급 타이틀 에 도전했다면 어떤 결과가 나왔을까!

각설하고 부상으로 인해 세계타이틀전이 무산되자 의욕을 상실한 유흥석은 1983년 3연속 KO 퍼레이드를 펼치면서 재기에 시동을 걸었지만 세기 프로모션은 최충일 박찬희 김지원 최진식에 비즈니스를 집중하면서 유흥석은 뒷전으로 밀리게 된다.
1985년 2월 27전 22승 (16KO) 4무 1패의 기록을 남기고 유흥석은 미련 없이 링을 떠난다. 은퇴후 성실한 사업가로 변신한 유흥석은 경기도 화성시 반월동에 건물을 보유할 정도로 안정된 생활을 하면서 세계정상에 오르지 못한 아쉬움을 달래고 있다. 현역시절 헤라클레스처럼 다부진 몸매에서 화염방사기처럼 매서운 강타를 뿜어낸 추억의 복서 유흥석의 건승을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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