필자는 주말이 되면 체육관 인근에 위치한 서울 올림픽공원을 1시간 이상 걸으면서 산책한다. 걸으면 집중력 추상적 사고능력과 영감을 끌어올리는데 탁월한 효과가 있어 글쓰는데 도움이 되기 때문이다. 지난 주말 산책길에 잊혀진 복서 권철이 불쑥 떠올랐다.

곧바로 권철 선배에게 전화를 걸어 오랜만에 통화를 하면서 안부를 물었다. 권철(본명 강은길)은 1961년 2월 경남 밀양에서 병원을 운영하는 강성일씨의 2남 3녀중 막내로 태어나 집안의 귀여움을 독차지했다. 그러나 1965년 어느날 아버지와 함께 서울 성북구에 위치한 고모집을 다녀가던 길에 평소 술을 좋아한 아버지가 과음해 부산행 열차 안에 그만 그를 두고 내려버렸다.
강씨 일가는 그동안 강은길의 호적을 그대로 둔 채 그를 찾아 다녔지만 무위에 그쳤다. 결국 막내아들을 잃어버린 상실감에 아버지는 이듬해 병원을 폐업하고 폭음으로 일관하다가 화병으로 35세에 타계하고 말았다.

이 스토리는 오래전 필자가 부산에 거주하는 권철의 모친 한계숙 여사와 직접 통화를 하면서 알게 된 사실이다. 한 여사는 권철의 부친 강성일씨가 1931년생으로 대구에서 의과대학을 졸업하고 밀양에서 병원(내과 및 소아과)을 운영했다고 한다.
이런 기구한 사연을 간직한 권철은 언젠가 필자와 만난 자리에서 그동안 언론에 한번도 공개하지 않은 비화를 허심탄회하게 털어놓은 적이 있었다. 기차에 홀로 남은 그는 서울시 서대문구에 있는 시립아동보호소로 옮겨져 1964년 6월 3일생 권철이란 이름으로 재탄생, 그곳에서 유소년기를 보낸다.
총 3천명 수용인원을 보유한 이곳의 아이들은 본인들의 이름도 나이도 고향도 모르는 기구한 사연을 간직한 아이들이 대부분이었다 한다. 보호소에 수용된 아이들은 닭장처럼 비좁고 열악한 환경 속에서 제대로 먹지도 못하고 치료도 받지 못한 채 이런저런 사연으로 죽어 나갔다.
새벽이면 청소차가 쓰레기를 치우듯 연고자가 없는 시신들을 차량으로 운구해가는 그런 모습을 지켜보면서 소년 권철은 성장한다. 후에 알려진 바로는 무연고 시신들은 병원으로 이송 실험 실습용으로 사용했다고 한다.
권철이 시립보호소에 들어간 1965년 한국의 국민소득은 필리핀의 절반 수준인 100불이었고 최빈국 방글라데시와 비슷한 수준이었다.
6, 25전쟁이 끝난지 13년의 세월이 흐른 당시 한국의 심각한 경제난을 알 수 있는 대목이다. 그곳에서 생활하던 어느날 울타리 너머 가정집 TV 화면에 비친 복싱경기를 지켜본 권철은 꿈틀거리는 야수본능이 강렬하게 끓어오른다. 1975년 애향원(보육원)으로 옮겨진 권철은 1976년 11월 노병엽 관장이 운영하는 상원 복싱체육관에 입관, 복싱을 배운다.

차돌처럼 작고 단단한 체형의 권철은 중화중 시절 마라도나라 불릴 정도로 자그마한 키지만 현란한 발재간을 가진, 축구에 탁월한 재능을 보유한 학생이었다. 이처럼 뛰어난 기초체력을 바탕으로 유연성 순발력 펀치력 등 복싱에 필요한 기능을 완벽하게 습득한 권철은 이를 바탕으로 1978년 4월 제10회 전국 신인대회에 출전(L.플라이급) 4연속 KO 퍼레이드를 펼치며 결승에 진출한다.
그러나 결승전에서 후에 동양 챔피언에 등극하는 사우스포 김성남에 판정패를 당하면서 은메달을 획득한다. 그해 7월 제28회 학생선수권대회에 출전, 결승에 진출했지만 역시 결승전에서 컴퓨터처럼 정교한 복싱을 펼치는 그 유명한 김기택(안성중)이란 장벽에 막혀 고배를 마신다. 그러나 1979년 권철은 제29회 학생선수권 (밴텀급) 결승에서 맞수 김기택(안성중)을 꺽고 우승과 함께 최우수복서(MVP)에 선정된다.
1980년 권철은 서울체고에 입학해 이해정 안영수 방승현 정유성과 함께 동기생으로 훈련을 한다. 당시 권철의 담임이었던 구창모 선생은 언젠가 필자에게 "철이는 말이 없고 친구들과 잘 어울리지 못하는 학생이었다"고 말했다.
그곳에서 김창석 선생의 지도를 받은 권철은 그해 6월 4일 전국에 생방송으로 중계된 아마복싱 밴텀급 간판스타 황철순의 은퇴 경기 파트너로 낙점되어 문화체육관에서 일전을 벌인다.
이 대결에서 서울체고 1학년 권철은 스피드에서만 다소 뒤 졌을뿐 체력과 펀치력에서 우세를 보였지만 판정패를 당한다, 공교롭게도 그 경기가 양 선수 아마추어 마지막 공식경기가 되었다.
권철은 곧바로 서울체고를 중퇴하고 그해 11월 프로에 전향, 1981년 제11회 MBC 신인왕전에 출전 최우수신인왕(MVP)에 선발되면서 13연승(9KO)을 기록한다.

국내 밴텀급 3위에 랭크된 권철은 1982년 5월 9일 필리핀의 펠 아포론트와 경기를 벌인다.
그때 TV를 통해 경기를 지켜본, 한때 아마추어 선수 생활을 한 경력이 있는 강은태 씨가 권철이 친동생이란 확신을 갖고 상원체육관 노병엽 관장에게 연락을 취했다.
전화를 받은 노 관장은 권철에게 미칠 영향을 고려해 비밀리에 그의 가족과 접촉, 호적등본과 혈액검사 돌 사진 등 확인절차를 거쳐 13일 첫 대면을 시키면서 호적 말소 직전인 17년 만에 극적으로 가족 상봉이 이뤄졌다. 이를 전환점으로 권철은 훈련에 더욱더 몰입한다.
사기충천한 권철은 얼마 후 백인철 김득구 유환길 황준석등 엄선된 프로복서 10여명과 함께 태릉선수촌을 방문, 그해 개최되는 뉴델리 (인도) 아시안 게임에 출전할 국가대표 선수들과 스파링을 펼쳤다. 권철의 파트너는 밴텀급 국가대표 문성길이었다.
권철은 문성길과 스파링에서 불꽃 튀는 타격전속에서도 공·수·주에서 전혀 밀리지 않는 만만치 않은 기량을 과시하며 10여명의 선수들중 최고의 선전을 펼쳤다. 이때 스파링 장면을 취재하기 위해 참관한 동아일보 이계홍 기자가 '프로 복서중 유일한 생존자(?) 권철'이라는 기사를 실었을 정도다.
이에 크게 고무된 그의 모친은 링에서 찾은 아들이니까 세계챔피언이 될 때까지 돕겠다고 밝혔다. 그러나 좋은 일에는 방해되는 일이 생긴다는 호사다마란 말처럼 가족 상봉과 함께 기다렸다는 듯이 입영통지서란 불청객이 찾아온다.
단체생활이 싫어 서울체고도 입학 한지 불과 6개월만에 중퇴한 권철에겐 군 입대는 마른 하늘에 날 벼락을 맞는 것 같은 큰 충격이었다. 얼마 후 권철은 가족과 생이별, 도살장에 끌려가듯 국군체육부대(수경사)로 향한다. 그곳에서 권철은 양일 이종학 이승훈 정종관 최상우 등과 함께 훈련하는 도중 단체생활에 적응하지 못하고 수차례 하극상 사건을 일으킨다.

결국 부대 영창을 들락날락하면서 이방인처럼 적응하지 못하면서 경기력이 급하강한다. 결국18연승 (12KO) 무패를 질주하던 권철은 1983년 7월 페리그라노와 대결에서 바위처럼 단단했던 멘탈이 물렁해지면서 무승부를 기록한다.
군 복무를 마친 1985년 어느날 극동 프로모션 전호연 회장이 IBF 페더급 1위 WBC 동급 1위를 기록한 권철에게 세계정상에 도전시킬 프로젝트를 제시하면서 스카웃 의사를 표명한다. 그러나 그 카드가 불발에 그치면서 권철은 1987년 5월 최강을 2회 KO로 잡고 27전 26승(19KO) 1무의 전적을 호랑이 가죽처럼 남기고 소리소문없이 링을 떠난다.

권철이 만약 챔피언이라는 타이틀에 포커스를 맞추고 눈앞에 쌓인 장애물을 슬기롭게 제거하면서 훈련에 몰입했다면 그가 친형처럼 따르면서 좋아한, 최초로 국내 프로복싱 2체급을 석권한 홍수환 챔프에 버금가는 명복서 반열에 올랐으리라 믿어 의심치 않는다.
홍수환 챔프는 2005년 권철이 결혼식을 올릴 때 직접주례를 보면서 변함없는 선후배 간 우애를 보여주었다. 은퇴 후 권철은 한국관 영업부장을 맡아 건재를 과시했고 이후 2차례에 걸쳐 복싱체육관 관장을 역임하다 현재는 모두 접고 지금은 자택이 있는 면목동에 칩거하면서 공익사업을 염두에 두고 밑그림을 그리고 있다.
수개월 전부터 술 담배를 모두 끊고 새롭게 인생 후반전을 준비하는 그의 건승을 바란다.
글쓴이 조영섭 복싱전문기자는 1980년 복싱에 입문했고 현재 문성길 복싱클럽 관장을 맡고 있는 정통 복싱인이다. 1963년: 군산출생 1983년: 국가대표 상비군 1984년: 용인대 입학 1991년: 학생선수권 최우수지도자상 1998년: 서울시 복싱협회 최우수 지도자상 2018년 서울시 복싱협회 부회장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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