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토요일 청평 가족호텔에서 KBC( 한국 권투위원회)가 주관하는 복싱 경기가 열렸다.

현장에는 오랜만에 프로복싱 2대 챔피언이자 전직 KBC 회장인 홍수환 챔프가 등장 분위기를 한껏 띄웠다.

올해 73세인 홍 챔프는 프로복싱 최초의 2체급 챔피언이다.

중요한 사실은 2체급 모두 원정경기의 헨디캡을 극복하고 탈취한 타이틀이란 점에서 가치(Value)를 높혔던 복서다.

양주 에서 청무관(靑武館)이란 간판을 내걸고 복싱 체육관을 운영하는 최응산 관장은 1962년 충남 예산 출신으로 1982년 청소년 국가대표로 발탁되어 해외 원정을 경험한 복서다. 1983년 프로로 전향한 그는 16전 12승(10KO) 4패를 기록하면서 동양페더급 2위에 올랐던 복서다.

최응산관장 홍수환챔프 김찬수 국제심판(우측)
최응산관장 홍수환챔프 김찬수 국제심판(우측)

 그후 지도자로 변신 2017년 6월 노사명이 일본에 원정 챔피언 다케나카 료가 보유한 동양 페더급 타이틀에 도전 10회 KO승을 거둘 때 최응산 관장은 핵심 역할을 했다.

WBA 국제심판 김찬수는 1965년 임실 출신이다. 아마츄어 시절엔 유창현 원점도 이방헌 오경묵등과  어우러져 한영고의 한축을 담당한 유망주였다.

1985년 프로로 전향한 김찬수는 1987년 3월 현재 목포여상 교장으로 재직중인 장성호(88체)와 국내 웰터급 타이틀전을 펼쳤지만 분패한다.

심기일전(心機一轉)한 김찬수는 5월 해외 원정경기에서 4연속 KO 퍼레이트 를 펼친 12승 (10KO)를 기록한 베테랑 박재용과 라이벌전을 펼쳐 2회 KO승을 거두며 주목을 받았던 복서다. 

유장호 김승미 홍수환 (좌측부터)
유장호 김승미 홍수환 (좌측부터)

청평에서 대회를 마치고 다음날 계획된 스케줄에 따라 위례역으로 떠났다. 이곳에서 웰터급에서 국가대표로 활약한 유장호 선배를 취재하기 위해서였다.

자택에 도착하니 유장호 김승미 홍수환등 세분이 함께한 사진이 나의 시선을 사로잡는다.

유장호 홍수환은 수경사 출신이고 올림픽선발전에서 2차례나 우승을 차지하고도 중량급이란 이유 때문에 단 한차례도 올림픽에 출전 하지 못한 비운의 복서 김승미는 해군 출신이다.

이사진을 보는 순간 본능적으로 해체된 수경사를 하루빨리 재창단 해야 한다는 생각이 스쳐갔다. 과거에는 육군팀 해군팀은 물론 해병대팀과 방첩대팀도 있어 사즉생(死卽生) 이란 슬로건을 내걸고 군팀간에 치열한 경쟁을 펼친 지난날이 스쳐 갔기 때문이다.

나는 한국복싱 부활의 첫걸음은 해체된 수경사 복싱팀 재창단이란 신념을 확고하게 가지고있다.

클레버(Clever)한 수경사 출신의 홍수환 챔프가 이를 염두(念頭)에 두고 이글을 읽으리라 믿는다.

수경사 소속의 유장호선수
수경사 소속의 유장호선수

한국에서 탄생한 43명의 세계 챔피언 중에서 수경사에서 탄생한 챔피언은 홍수환을 필두로 유제두 염동균 이승훈 백인철 유명우 이경연 장태일 박영균등 9명이 탄생했다.

한마디로 챔피언 탄생의 매개체(媒介體) 역할을 한곳이 수경사다. 난 수경사 출신의 유장호 선배와 그의 자택에서 6시간에 결쳐 담화를 나누기 시작했다.

유장호는 1949년 6월 김포 출신이다. 그는 가수 정미조와 초등학교 동창이고 축구 국가대표 이회택은 3년 선배다. 

49회 체전서 은과 금을 합작한 박형석 박형춘 형제복서(우측)
49회 체전서 은과 금을 합작한 박형석 박형춘 형제복서(우측)

정미조는 김소월의 시(時)에 곡을 붙혀 만들어진 <개여울>이란 노래를 1972년 데뷔곡으로 부른 가수다.

또한 김포는 IBF 주니어 밴텀급 챔피언 권순천과 동양 페더급 챔피언 박찬목이 태어난 고장이다.

역사의 수레바퀴를 5백년 전으로 되돌리면 1592년 임진왜란이 발발(勃勃)하자 의병을 일으켜 금산전투에서 왜군들의 호남진출을 죽음으로 막아낸 중봉 조헌 장군이 탄생한 고장이다.

각설하고 유장호는 1966년 종로 5가에 위치한 창한 체육관에서 김창한 관장의 지도로 복싱에 입문한다. 일성 체육관에서 고봉아 관장의 지도를 받은 김창한 관장은 1958년 제3회 동경 아시안 게임에서 동메달(플라이급)을 획득한 복서다.

유장호는 1967년 3월 서울 신인대회에 출전 웰터급 결승에서 배한희(한체)에게 판정패 준우승에 머문다.

그러나 4월에 벌어진 아시아선수권 대회 준결승에서 유인구(경희대)를 RSC로 잡으며 센세이션을 일으킨다.

7월에 벌어진 아시아선수권 선발전에서는 이민호((해군)를 잡고 한뼘씩 성장하면서 우승컵을 들어 올린다.

이민호는 1968년 멕시코 올림픽 선발전 에서 유제두를 꺽은 강자였다. 172Cm의 단신의 유장호는 민첩한 보디웍과 헤드웍으로 상대의 공쇄를 무산시킨후 묵직한 좌우훅으로 상대를 쓰러뜨리는 전형적인 슬러거(Slugger) 였다.

그해 12월 유장호는 한중 국가대항전에 대표선수로 발탁되어 우승을 차지하면서 이창길 지용주등과 함께 선수촌에 입촌한다. 

49회 전국체전 결승에서 유제두와 격돌하는 유장호 (좌측)
49회 전국체전 결승에서 유제두와 격돌하는 유장호 (좌측)

밴텀급에는 남영웅(고명상고ㅡ명지대)이 선발되어 주목을 받았다.

남영웅은 1936년 베를린 올림픽 마라톤에서 은메달을 획득한 남승룡 선생의 친조카로 1970년 방콕아시안게임 최종선발전 L급에서 김현치와 일전을 펼쳤던 복서다.

1968년 유장호는 동아대에 진학 그해 9월 벌어진 49회 전국체전에 부산 대표로 출전 결승에 오른다.

그의 결승 상대는 훗날 WBA 주니어 미들급 세계 챔피온 유제두(경기도)였다. 그 경기에서 유장호는 판정승을 거두면서 금메달을 획득한다.

49회 전국체전은 한국 아마 복싱사상 최초로 형제 복서가 나란히 결승에 진출 금과 은을 합작한 진기록이 탄생한 대회였다. 

유장호 소장 부부
유장호 소장 부부

주인공은 LM급에 출전한 박형석과 LH급에 출전한 박형춘 형제 복서였다.

강원 대표로 출전한 두 복서는 동생 박형석이 박조(경남) 에게 판정패 은메달에 머물렀지만 형 박형춘은 하병식(경북)에 판정승 금메달을 목에 걸었다.

두 형제는 1970년 방콕 아시안게임에 나란히 출전 동생 박형석이 금메달 박형춘이 은메달을 획득 형제는 용감했다를 실증(實證)한 장본인들이다.

1969년 유장호는 전매청에 입단한다. 그해 4월 일본대학과 친선대회를 펼친다. 당시 전매청의 멤버는 F급의 고생근과 B급의 장규철 FE급의 황영일 L급의 김재근 LW급의 차의태 W급의 유장호가 포진된 초호화 멤버였다. 

유장호 소장 가족사진
유장호 소장 가족사진

이대회 에서 전매청은 고생근 장규철 황영일 유창호가 승리를 거둬 일본대학팀에 4ㅡ2로 이겼다.

그해 6월 벌어진 멕시코 올림픽선발전에서 유장호는 최종결승에서 박구일에 석패 한다, 1969년 8월 유장호는 아시아선수권대회 선발전 8강에서 박형석(원주대)에 고배를 마신다, 박형석은 주호(권일)에게 결승전에서 패하면서 주호는 국가대표로 발탁된다.

본선에 진출한 주호는 1970년 4월 본선(필리핀 마닐라) 에서 금메달을 획득한다. 이런 관록을 보유한 주호는 70년 아시안게임 선발전에서 정영근에 패한면서 출전권을 상실한다. 주호를 꺽고 본선(방콕)에 진출한 정영근은 금메달을 획득한다.

당시 중량급임에도 불구하고 한국복싱의 두터운 선수층을 엿볼수 있는 대목이다. 63전 57승(43KO) 6패의 아마츄어 전적을 뒤로하고 1970년 3월 유장호는 동신 프로모션(김주식) 소속으로 프로에 전향한다.

그리고 49회 전국체전 LM급 우승자 박조와 10월에 맞대결을 펼쳐 묵직한 라이트 일격으로 5회 KO승을 거두는등 파죽의 11연승(6KO)을 질주한다. 

일본선수와 국제경기를 펼치는 유장호선수(우측).
일본선수와 국제경기를 펼치는 유장호선수(우측).

그해 7월 30일 유장호는 동양 JR. 미들급 타이틀전을 치루기 위해 일본에 원정을 간다, 챔피언은 가네자와 히데오. 제일 동포로 한국명 김영범인 가네자와 는 유제두와 동양 타이틀전을 펼쳐 무승부를 기록한 우리에겐 친숙한 복서였다.

그러나 유장호는 이대결 에서 반칙타 를 때렸다는 이유로 석연찮게 5회 실격패를 당한다.  

유장호는 71년 11월 박상조와 국내 미들급 타이틀전을 펼쳐 10회 판정승을 거둔다.

그리고 1,2 차방어전에서 1970년 방콕 아시안 게임에서 금메달을 획득한 국가대표 출신 박형석과 방어전을 펼쳐 연승을 거두면서 아마츄어시절 박형석에 당한 패배를 설욕한다.

1973년 5월 김한식과 3차 방어전에서 판정패를 당하자 18전 15승 1무 2패(7KO)를 기록한 유장호는 결혼과 함께 링을 떠난다.

그의 나이 25세였다. 그는 이대 물리학과를 졸업한 아내 김경희 여사와 사이에 2남을 두었다.

이후 유장호는 대형 건설업체 소장을 맡으면서 큰 성공을 거뒀고 이를 발판으로 포석정이란 대형 음식점을 차려 경제적으로 굴곡없는 안정된 삶을 유지한다.

유장호는 김태호처럼 자식 농사도 풍년이다. 큰아들 유영균은 건국대학을 둘째 유영현은 연세대학을 졸업하고 사회에 진출 탄탄하게 기반을 닦은 것이다.

현재 유장호 소장은 모든 것을 내려놓고 풍광 좋은 30평대 APT에서 아내와 단둘이 평온하게 지내고 있다. 유장호 소장의 행운을 빈다.

조영섭기자는 복싱 전문기자
조영섭기자는 복싱 전문기자

조영섭기자는 복싱 전문기자로 전북 군산 출신으로 1980년 복싱에 입문했다.

1963년: 군산출생

1983년: 국가대표 상비군

1984년: 용인대 입학

1991년: 학생선수권 최우수지도자상

1998년: 서울시 복싱협회 최우수 지도자상

현재는 문성길 복싱클럽 관장을 맡고 있는 정통복싱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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