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4일 전 원진 체육관 소속의 트레이너 김용석 사범이 모친상을 당해 서울 금천구에 있는 빈소를 찾았다.

1957년 전북 고창 출신의 김 사범은 1975년 상경 중앙체육관소속으로 권수복 사범의 지도로 촉망받는 유망주로 성장, 김태호와 오영호의 스파링 전문 파트너로 활약했다.

모친상을 당한 김용석 사범 부부
모친상을 당한 김용석 사범 부부

그 후 프로로 전향 4연승을 올렸지만 부상으로 복싱을 접고 원진 체육관 김규철 관장 문하에서 트레이너로 변신한다.

그곳에서 심혈을 기울여 선수들을 조련, 최규운 전형길 박봉춘 이종학등 걸출한 복서들을 차례로 잡아내면서 17승(10 KO)을 기록한 투타임 J 라이트급 챔피언 최완택, 표명길 김두산 안창배 곽승주 김우천 등 유망주들을 연파한 84년 MBC J 페더급 신인왕 임종대, 81년 MBC 신인왕 출신의 손오공을 배출하며 지도력을 인정받는다.

그러나 19승 (9KO) 1패를 기록한 WBA 라이트 플라이급 4위 손오공이 85년 9월 17전 전승 (3KO)를 기록한 WBA 동급 7위 유명우와 벌인 세계 타이틀전 도전자 결정전에서 7회 KO패를 당하자 트레이너 생활을 접는다.

이후 개인 사업을 벌여 호황을 맞기도 했지만 코로나 사태로 인해 지금은 사업을 접고 숨 고르기를 하고 있다. 

1982년 김명복박사배 최우수복서 장경재
1982년 김명복박사배 최우수복서 장경재

지난 주말에는 부산 해운대구에서 복싱 체육관을 경영하는 장경재 관장을 취재하러 나섰다. 현장에서 프로복싱 국제심판 문무홍 선생과 장 관장의 친구인 사업가 채훈도 현지에서 만나 오찬을 하면서 많은 이야기를 나눴다.

장정구 챔프를 통해 인사를 나눈 채훈은 1964년 부산태생으로 장정구 챔프와 함께 부산 태성 체육관 이영래 사범 문하에서 선수 생활을 하면서 부산 동아고 동아대를 거친 엘리트 복서 출신이다.

현역시절 장정구 챔프의 전문 스파링 파트너로 활약하면서 장 챔프와 친분이 두터운 화끈한 남자다.

임진 왜란때 거북선이 실전에 최초로 투입된 격전지로 유명한 삼천포(현 사천시)태생의 문무홍 선생(1941년생)은 12전의 아마추어 경력을 배경삼아 1978년 아마복싱 심판으로 복싱에 입문, 1983년부터 본격적으로 프로 복싱 무대인 동양 태평양 복싱연맹(OPBF)과 국제복싱연맹(IBF)심판으로 활동한 베테랑 심판이다.

태국복싱 레전드 베라폴 사하프롬(중앙)과 문무홍 심판(우측).
태국복싱 레전드 베라폴 사하프롬(중앙)과 문무홍 심판(우측).

그는 1994년 메이저 리그 기구인 WBA 심판 자격증을 취득, 20년간 현장에서 왕성하게 활동하면서 장정구 챔프를 비롯한 수많은 복싱인 들에게 사랑과 존경을 받아온복싱인이다. 장정구 챔프 전언에 의하면 동갑내기 절친인 고(故) 이영래 사범과의 인연으로 복싱과 인연을 맺었다고 한다. 

1964년 11월 서울 태생의 장경재는 원적지가 전남 승주군이다. 유년 시절부터 주력이 좋았던 그는 초등학교 시절 현란한 발재간으로 유종만 백인철 오광수 조인주 등 전직 복서들과 더불어 축구를 잘하는 대표적인 복서 중 한 명이다. 그는 초등학교 시절 학교에서 복싱을 수련한 당시 수경사소속의 복서와 인연이 되어 운동장에서 복싱을 배웠다.

장정구 생가터 에서 문무홍 심판과 장경재관장(우측)
장정구 생가터 에서 문무홍 심판과 장경재관장(우측)

그러던 어느날 친척이 사는 부산에 놀러 갔다가 운명처럼 당시 동아대학에 재학중이던 박찬희와 만남을 갖는다. 1976년 몬트리올 올림픽에 출전한 박찬희는 어린 장경재 에겐 선망의 대상이였다. 박찬희는 그에게 연락처를 적어주었고 그는 복싱운명의 전환점을 맞이한다. 1978년 그는 부산에 정착한다. 그리고 박찬희가 소속된 부산 동아체육관에 둥지를 틀고 이듬해 부산 구봉중학교에 입학 천부적인 복싱 자질을 유감없이 발휘한다. 특히 졸업반인 1981년 7월 제31회 학생선수권 대회에 모스키도급 (42Kg)에 출전 준결승전에서 청주 수신중 안광원을 3회 RSC승 을 거두면서 4연승(3KO)을 질주, 우승을 차지하면서 기염을 토한다.

1982년 부산 협성실고에 진학한 장경재는 김명복배에 출전 코크급(45Kg) 준결승전에서 전남체고 오광수와 한판 승부를 벌인다. 오광수는 1981년 3월 벌어진 전국 신인대회에서 한양공고의 김광선에 판정승을 거두고 우승을 차지한 여세를 몰아 그해 개최된 제12회 대통령배 대회와 전국체전을 석권하면서 3관왕을 달성한 난공불락의 복서였다. 이 대결에서 장경재는 오광수에 3회 RSC승 을 거두면서 대회 최대 이변을 만들었다.

오광수와 격돌하는 장경재(좌측).
오광수와 격돌하는 장경재(좌측).

결승전에서도 대구 대표 신주섭을 맞이하여 5ㅡ0 판정으로 잡고 우승과 함께 대회 최우수복서(MVP)에 선정된다. 결승전에서 장경재에 패한 국가대표 상비군 출신의 신주섭은 1983년 대통령배 준우승 1987년 전국선수권을 재패한 강호였다. 신입생이 김명복 배 우승과 함께 대회 최우수 복서(MVP)에 선정된 기록은 당곡고 권만득과 함께 유이한(有二)한 기록이다. 그해 전국체전 선발전에서 장경재는 부산체고 경량급의 쌍두마차 최희용과 강영수를 연달아 잡으면서 본선 진출권을 획득한다. 하지만 본선 준결승전에서 경북대표 최점환에 판정패, 성장통을 겪는다. 하늘 높은 줄만 알았던 장경재가 땅 넓은 것도 체험한 소중한 일전이었다.

최점환과 대결을 펼치는 장경재(우측).
최점환과 대결을 펼치는 장경재(우측).

그해 12월 장경재는 전국선수권 대회에 출전한다. 1회전 상대는 1981년 7월 미국의 노드 캐롤라이나주 에서 개최된 제33회 세계군인선수권대회 결승에서 미국의 오벤투라를 꺽고 대망의 우승컵을 들어 올린 우승을 차지한 조경영(수경사)이었다. 이경기에서 장경재는 송곳 같은 카운터를 연달아 작렬시키면서 우세한 경기를 펼쳤지만 판정패를 당한다. 당시 조경영은 경기 후 직속 상관에게 심한 질타를 받을 정도로 사실상 패한 경기를 펼쳤다. 안타깝게도 이 경기는 장경재의 아마추어 경기의 마지막 경기였다. 가슴에 묻어둔 비화가 있는 듯 했지만 장경재는 끝내 침묵으로 일관했다.

1983년 3월 중견 복서 한금섭을 군말 없는 판정으로 잡고 프로에 전향한 장경재는 후에 WBA 미니멈급 챔피언에 등극하는 김봉준과 6회전 경기에서 원 사이드한 경기를 펼쳐 5연승을 기록한다. 여담이지만 김봉준은 4전째에 김성재에 2회 KO패 7전째에 장경재 판정패 10전째에 허준에 3회 KO패 16전째에 임하식에 판정패를 당한 전형적인 잡초복서였다.

김봉준에 맹공을 가하는 임하식(좌측)
김봉준에 맹공을 가하는 임하식(좌측)

 그러나 17전부터 연승가도를 질주, 91년 2월 최희용에 판정패해 WBA 미니멈급 타이틀 6차방어전에서 벨트를 풀 때까지 15전 13승 1무 1패를 기록했다. 그 1패도 레오 가메즈에게 억울하게 당한 1패였으니 김봉준 선수의 불굴의 감투 정신을 칭찬하고 싶다.

장경재는 김봉준과의 경기후 숙적 최점환과 라이벌전을 펼친다. 최점환은 1980년 제4회 김명복 박사배 제61회 전국체전에서 허영모를 잡고 패권을 차지한 톱 복서였다.이 대결은 양선수 한치의 양보도 없는 창과 방패의 치열한 공방전을 펼친 끝에 장경재는 판정패를 당한다.

1986년 1월 장경재는 최창호 김봉준등 두명의 세계챔피언에게 패배를 안겨준 임하식과 한국 J플라이급 타이틀 결정전에서 판정승해 최점환에 당한 첫 패배의 아픔을 달랜다. 그리고 동아체육관의 정창호를 3회 KO시키면서 1차방어전에 성공하자 매의 눈으로 그의 경기를 지켜본 김현치 관장에 의해 동아체육관으로 스카웃 되어 안착한다. 

장경재 관장 문무홍 심판 사업가 채훈(왼쪽부터)
장경재 관장 문무홍 심판 사업가 채훈(왼쪽부터)

지략가 김회장은 유명우가 챔피언에서 물러날 때를 대비해 후계자로 장경재를 영입한다. 86년 3월 유명우는 1차 방어전(헤수스)에 성공 2차방어전을 준비하고 있었다. 그러나 유명우의 롱런은 길어도 너무 길었다. 1991년 12월 17일 18차 방어전에서 도전자 이오까에게 벨트를 풀때까지 무려 6년 9일동안 철옹성처럼 타이틀 방어에 성공하면서 장경재는 돌파구를 찾지 못하고 전전긍긍하고 있었다.

이 대목에서 문득 고구려 20대 장수왕의 아들 조다 이야기가 생각난다. 18세에 권좌에 오른 장수왕은 이름처럼 97세까지 장수하면서 재위 기간만 80년에 이르는 역대급 왕이다. 그의 아들 조다는 왕의 자리를 승계할 태자로 왕이 되길 희망 했지만 아버지가 너무 장수하는 바람에 먼저 세상을 떠나면서 왕이 되지 못하고 결국 음운학적 변천 과정을 거쳐 '쪼다'가 되어버렸다는 설이 있다.

결국 장경재도 장수왕의 아들 조다 처럼 왕위 계승을 기다리다 지쳐 멘탈 붕괴가 손목부상으로 연결되었고 급기야 88년 1월 홍창우에게 6회 KO패를 당하면서 국내 타이틀을 상실, 무관으로 전락한다. 이후 체중이 불어 플라이급으로 월장, 89년 8월 양찬우와 국내 플라이급 타이틀전을 펼쳐 7회 KO승을 거두었지만 유명우의 롱런으로 인해 꿈과 희망이 사라진 장경재는 곧바로 타이틀 을 반납하고 25세 젊은 나이에 사실상 복싱을 접는다. 

체육관 입구에서 장경재 관장
체육관 입구에서 장경재 관장

반면 유명우는 1993년 7월 호소노와 통산 18차 방어에 성공하고 타이틀을 자진반납 29세에 최장수 챔피언으로 품위를 유지하면서 명예롭게 은퇴했다. 장경재는 은퇴후 97년부터 3년간 부산체고 복싱강사로 근무하면서 1999년 전국체전 밴텀급 준우승자인 김억태를 배출하는 등 지도력을 인정받는다. 그리고 성실하게 직장 생활을 하면서 12년 전 부산 해운대구에서 단란한 가정을 이뤄 행복하게 살고 있다. 현재 장 경재는 아시아 다이어트 복싱클럽을 2년 전에 설립, 이순에 접어든 나이에도 불구하고 젊은 관장 못지않게 왕성하게 활동하고 있다. 선수 시절 못다 이룬 링 위에서 아쉬움을 접고 새롭게 인생 3막을 펼치는 장경재 관장의 건승을 바란다.

최점환과 대결을 펼치는 장경재(우측).

조영섭기자는 전북 군산 출신의 복싱 전문기자로 1980년 복싱에 입문했다.

조영섭 복싱전문 칼럼니스트
조영섭 복싱전문 칼럼니스트

1963년: 군산출생

1983년: 국가대표 상비군

1984년: 용인대 입학

1991년: 학생선수권 최우수지도자상

1998년: 서울시 복싱협회 최우수 지도자상

2018년 : 서울시 복싱협회 부회장

현재는 문성길 복싱클럽 관장을 맡고 있는 정통복싱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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