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주말 필자의 체육관에 반가운 손님이 방문 옛이야기로 꽃을 피우며 즐거운 한때를 보냈다.
주인공은 현재 ㈜신덕약품 물류부 김설권 부장이다. 그와의 인연은 지금으로부터 35년전으로 돌아간다.

나의 지도자 원년인 1989년 영등포 88체육관에서 용산공고 코치로 입성했을 때 김 부장은 중학생 관원이었다.
1990년 용산공고 2학년에 진학한 최요삼의 1년 후배인 김 부장을 용산공고로 스카웃 하려 했으나 그를 지도한 88체육관 K 사범이 인근의 한강 실업학교로 그를 입학시켜 그는 나와 사제지간의 인연으로 승화(昇華)되지는 않았다.
1974년 서울태생의 김 부장은 전형적인 업 라이트형의 복서였다. 김부장은 한강 실고 소속으로 5차례 각종 전국 무대에 출전하였지만 신용철(리라공고) 신은철(대전체고)의 견고한 벽에 막혀 3차례나 동메달을 눈앞에 둔 8강전에서 고배(苦杯)를 마셨다.
18전 13승 (4KO) 5패의 평범한 전적을 뒤로하고 1992년 8월 23일 신동국을 2회 KO로 잡고 프로에 전향한다.

1994년 히로시마 아시안게임 국가대표(플라이급)로 출전한 신동길과 한국 플라이급 타이틀전을 펼친 중견 복서 노호섭 (청담)과 1993년 11월 21일 문화체육관에서 무승부를 기록 하는 등 프로통산 5전 2승 2무 1패를 기록한 김설권은 이후 군 복무 관계로 링을 떠났다.
내가 그에게 관심을 가진 이유는 1946년 목포태생인 그의 선친 김지연 씨가 목포복싱의 대부(代父) 최진태 관장과 목포체육관에서 동문수학한 복서 출신이란 이유 때문이다.
그의 선친은 월남전에 최진태 관장 가수 남진과 함께 목포 출신 3총사를 형성한 참전용사다.
그런 사연을 간직한 김 부장과 그날 취재가 예약된 송파 나루역에서 복싱 체육관을 운영하는 김강용 관장을 만나기 위해 현장으로 동행했다.

1988년 8월 서울 태생의 김강용은 중학교 1학년 때인 2002년 강서 문성길 복싱 체육관 (관장 김보현) 수강생 이어서 평소 애착을 갖고 지켜본 복싱 유망주였다.
아이러니한 사실은 김강용은 복싱을 하기전 수학영재로 발탁되어 서울특별시에서 개최된 수학경시대회 에서 영예의 금상(金賞) 을 수상한 영특한 두뇌를 보유한 복서다. 이런 그를 보자 문득 수학에서 삼각형의 기본원리를 처음 밝혀낸 수학자 피타고라스가 떠올랐다.
그에게 피타고라스를 알고 있느냐고 묻자 수학영재답게 알고 있다고 답한다. 그러면 수학의 아버지라 불리는 (피타고라스)가 과거 (복싱인)이었다는 사실을 알고 있냐고 묻자 그 대목에선 모른다고 답한다.
일반인에게 잘 알려지지 않아서 그렇지 노인과 바다란 역작을 저술한 어네스토 헤밍웨이와 함께 그리스의 수학자이자 철학자 종교가인 피타고라스는 BC 588년 고대올림픽 복싱 금메달리스트다.
화곡고 1학년때 서울 신인대회(페더급)에 출전한 김강용은 폭 팔 적인 화력을 바탕으로 상대를 압도하면서 4전 4승(3KO)을 기록하면서 우승과 함께 최우수복서에 선정된다.

그리고 그해 4월 개최된 전국 신인대회에서 파죽의 3연속 RSC승을 거두면서 준결승에 진출한다, 준결승 상대는 경남체고 김정민. 공교롭게도 김정민은 김평국 대한복싱협회 심판위원의 장남이었다.
이 대결에서 김강용은 김정민과 맞대결에서 용호상박 난형난제의 초접전을 벌인다. 그러나 판정에 고개를 숙였다.
1960년 진주태생의 김평국 심판위원(경상대졸)은 1979년 9월 문화체육관에서 벌어진 세계청소년 대회(일본) 선발전(플라이급)에서 우승을 차지한 복서다.
그러나 당시 아마복싱을 쥐락펴락한 이재인 복싱협회 심판 위원장의 무소불위(無所不爲)의 위력 앞에 출전권을 박탈당한 비운의 복서다.
현역시절 왼손잡이 복서로 공포의 레프트 카운터 펀치로 명성을 날린 김평국은 훗날 세계 챔피언을 지낸 복싱 대통령 장정구를 비롯 박기철 정희조 권채오 유승기 이용장 장인수 임창용 등 특급복서들과 자웅을 겨루면서 승패를 주고받은 경남복싱의 에이스(Ace)였다.
특히 1979년 12월 모스크바 올림픽 선발전에서 1982년 대학선수권 최우수복서인 윤영환(동국대)과 1986년 리노 세계선수권 우승자인 문성길(목포 덕인고)을 연파하면서 상승세를 탄 김상수(대구공고)와 맞대결 회심의 일격으로 3회 RSC로 꺽으면서 제압한 경기는 압권이었다. 각설하고 김강용은 5월에 개최되는 연맹 회장배 대회에 다시 출전했다.

그러나 이번 상대도 또다시 경남체고 김정민. 그러나 한 단계 도약한 김정민과 재대결에서 판정패를 당한다.
김정민은 이후 유소년 국가대표로 발탁 되는등 가파른 상승세의 물결을 탔지만 패한 김강용은 아쉬움을 머금고 아마츄어 복싱계와 작별의 인사를 고했다.
2007년 2월 김강용은 프로로 전향 MBC 신인왕전(페더급)에 출전 하였지만 당일 계체량에서 3Kg을 감량하는 돌발상황이 발생 파김치가 되어 링에 오른다. 결국 2차례나 다운을 당하면서 판정패 예선에서 탈락하고 만다.
2008년 부천대에 입학한 그는 한 학기만 마친 후 곧바로 중퇴한다. 2009년 3월 해병대에 자원입대한 김강용은 2012년 현역에 컴백한다.
그는 그해 개최된 MBC 신인왕전(라이트급)에 출전 결승전에서 서울체고를 졸업한 강기성(태양)이란 복서를 상대로 위빙과 더킹을 자유자재로 구사하면서 판정승 제37회 전국신인왕전에서 대망의 우승을 차지한다.

이때 김강용은 척박한 국내 복싱 현실에서 미래가 불확실하다는 결론을 내린다. 수학 영재(英才) 출신답게 날카롭게 국내 복싱 현실을 직시(直視)한 것이다.
그리고 2009년 미국 링에서 4연승을 거두면서 승승장구한 IBO 슈퍼 페더급 챔피언 김지훈을 롤 모델(Role Model) 삼아 복싱의 본고장인 미국행을 결심한다. 그리고 곧바로 실행에 옮긴다.
김지훈의 에이전트인 이현석 (미국명 폴리)의 페이스북을 찾아 미국행 의사를 전달한 것이다. 답이 왔다.
의지가 있다면 돕겠다는 내용이었다. 이후 김강용은 영어공부에 매진하면서 미국행 경비를 마련하기 위해 닥치는 대로 잡일을 하면서 망중한(忙中閑)을 이용 틈틈이 훈련을 병행했다.
28세에 접어든 김강용은 마지막 불꽃을 미국 링에서 화끈하게 태우고 싶었다. 그래서 삼중고(三重苦)의 악재에도 불구하고 그는 풍차를 향해 과감하게 돌진하는 돈키호테식 기사도 (騎士道) 정신을 십분 발휘 한 것이었다.

세르반테스의 작품인 돈키호테는 할수 없는 일을 시도하는 것. 해보지 않은 일을 해보는 것. 안된다고 생각하는 일을 해보는 적극적인 의지를 지닌 사람들을 지칭(指稱)하는 또 다른 표현이다.
김강용은 2015년 2월 23일 필라델피아 공항에서 미국행에 가교(假橋) 역할을 한 이현석을 만나 페스트 레인 복싱 짐에 등록을 한다. 그리고 짐을 풀자마자 곧바로 훈련을 시작한다.
트레이너인 저스티스(미국)는 아르바이트를 하면서 성실하게 훈련하는 그를 위해 도미(渡美) 한지 불과 두달 만에 미국에서 프로 대뷔전을 주선한다, 2015년 5월 8일 김강용은 필라델피아 2300 아레나 체육관에서 토레스란 복서를 상대로 첫 회 기습적인 일타를 명중시키면서 한차례 다운을 탈취한다.
그리고 종료 직전까지 일방적인 공격을 펼쳐 4회 판정승을 거둔다. 사실 한국복서들에게 미국 링은 죽음의 무덤으로 알려진 무대다.
지난 1967년 9월 15일 WBA JR 라이트급 타이틀전에서 서강일이 LA에서 챔피언 라파엘 로하스에 15회 판정패를 당한 후 1986년 4월 박종팔이 비니 커토를 15회 KO승을 거둘 때까지 19년간 기록적인 24연패를 당했기 때문이다.
1912년 질레트라는 선교사에 의해 이땅에 복싱이 상륙한 이래 지금까지 미국 링에서 승리를 거둔 복서는 서강일 박종팔 김지훈 그리고 마지막 승리를 쟁취한 김강용까지 단 4명에 불과하다. 표본(標本)은 작지만 나름대로 감투 정신을 발휘 복싱의 본고장 미국 링에서 승전보(勝戰報)를 전달한 (4대 천왕)으로 기록된 자부심과 긍지를 지닌 복서가 바로 김강용이다.
김강용은 2015년 6월 타이런 럭키와 2차전을 벌여 첫회 다운을 주고받는 공방전을 펼쳤지만 판정에 고개를 숙인다. 그 경기가 김강용의 미국원정 마지막 경기이자 은퇴경기가 되고 말았다.

귀국한 그는 2019년 1월 송파나루 역 에 위치한 복싱 체육관을 인수 인생 2막을 새롭게 출발한다. 체육관에서 숙식을 병행하면서 정성스럽게 선수들을 지도한 김강용은 체육관을 오픈한지 불과 2년 만에 억대 연봉을 창출 하는 에너지가 차고 넘치는 열혈 사업가로 자리를 잡았다.
2023년 김강용 관장이 운영하는 송파 바이러스 복싱 체육관은 서울 신인대회에서 6체급을 석권 종합우승을 차지했으며 김강용은 최우수 지도자상을 받았다.
서글서글한 성품에 폭넓은 인맥을 자랑하는 향후 한국복싱을 이끌어갈 차세대 지도자 김강용 관장의 무궁한 발전을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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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영섭기자는 복싱 전문기자로 전북 군산 출신으로 1980년 복싱에 입문했다.
1963년: 군산출생 1983년: 국가대표 상비군 1984년: 용인대 입학 1991년: 학생선수권 최우수지도자상 1998년: 서울시 복싱협회 최우수 지도자상 현재는 문성길 복싱클럽 관장을 맡고 있는 정통복싱인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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