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영섭의 잊을 수 없는 순간과 선수]『천재 복서 김태호, ‘검은 9월단’에 날아간 대망』

【3. 다시 일어서서...세계 타이틀을 향해

실망감을 이기고 심기일전 한 김태호는 다음 해 육군 팀에 입단해 세계 군인선수권대회에서 우승하며 재기를 모색했다. 그해 방콕에서 개최된 제 6회 아시아 선수권 대회에서는 태국의 ‘비치트’를 샌드백 두들기듯 일방적으로 난타 한 끝에 금메달을 획득한다.

1974년 테헤란아시안게임에서도 그는 발군(拔群)의 실력을 발휘하면서 금메달을 획득한다. 1954년 제 2회 대회부터 아시안 게임에 출전한 한국 팀은 1974년 테헤란아시안게임까지 6회에 걸쳐 모두 66개의 금메달을 획득했다. 그중 복싱에서 획득한 금메달이 22개였다. 1974년 12월 김태호는 황철순, 유종만, 김주석, 김성철 등과 아시아 올스타 대표로 선발되어 미국 국가대표와 국가 대항 전을 펼쳤다.

세계타이틀 전에서 챔피언 세라노를 다운시킨 뒤여유로운 모습으로 지켜보고 있는 김태호(왼쪽).
세계타이틀 전에서 챔피언 세라노를 다운시킨 뒤여유로운 모습으로 지켜보고 있는 김태호(왼쪽).

그 대회에서 김태호는 우승과 함께 최우수 복서(MVP)로 선정되기도 했다. 동료 복서인 유종만 전(前) 한국체대 교수는 훗날 사석에서 “70년대 한국 아마 복싱의 별 중의 별은 김태호”라고 평가했다.

1975년 제 27회 세계 군인 선수권 대회에서 김태호는 또다시 금메달을 획득하면서 국제 대회 5관왕을 달성했다. 국내에서 120 전을 싸운 김태호를 이긴 복서는 서상영 고생근 김성은 단 3명에 불과할 정도로 그의 아성(牙城)은 굳건했다.

4. 김태호 푸로 전향

마침내 김태호는 프로로 전향한다. 그때가 1975년 10월이었다. ‘유종배 프로모터’와 최초의 세계 챔피언 김기수가 투 톱으로 기획한 ‘챔피언 만들기’ 프로젝트 일환으로 그를 스카우트 한 것이었다. 데뷔 전에서 그는 일본의 '요시무라'를 상대로 폭죽처럼 연타를 터뜨리면서 간단하게 3회 KO승을 거뒀다.

두 달 뒤 KBC 주니어 웰터급 챔피언이자 WBA 10위인 왼손잡이 강타자 김종호를 상대로 세계 랭킹 전을 벌였다. 이 대결에서 김태호는 물 찬 제비처럼 빠른 스피드로 상대를 압도하면서 판정승을 거뒀고, WBA 라이트급 8위에 오르기에 이른다.

세계 타이틀을 전을 앞두고 복싱 전문 지의 표지 모델로 등장한 김태호 선수에게 또다시 닥친 불운이 찾아왔다. 프로 데뷔 2전 만에 세계 랭킹 진입은 한국 복싱 사상 김태호가 최초였다.

이어 일본의 유망주인 ‘니시다 히로미’와 ‘나리다 조겐’을 연거푸 제압하며 6연승(3KO)을 달린 그에게 ‘푸에르토리코’의 WBA 세계 주니어 라이트급 챔피언 ‘사무엘 세라노’와 타이틀 전을 벌이기로 합의했다는 소식이 들렸다.

1977년 1월 16일 서울에서 펼치기로 양측이 합의를 본 것이다. 챔피언 세라노에게 지급될 대전료는 9만 달러였다. 김태호는 김기수, 홍수환, 유제두, 염동균에 이어 프로 복싱 제 5대 챔피언으로 등극할 절호의 찬스였다. 왜냐하면 32승 (7KO) 1무 2패의 챔피언 사무엘 세라노는 그다지 위협적인 챔피언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김태호 측은 일본인 트레이너 '마쓰모토' 씨를 영입해 트레이닝 캠프를 차리고 강훈(强訓)에 들어갔다. 1966년 김기수 챔프가 세계 타이틀을 치를 때 ‘리처드 보비’라는 외국인 트레이너를 세계 타이틀 전을 위해 영입한 후, 10년 만에 등장한 이방인(異邦人) 트레이너였다.

5. WBA 세계 주니어 라이트급 타이틀 전

그러나 이 타이틀 전은 경기를 불과 열흘을 앞두고 무산되고 만다. 1976년 10월 인천에서 벌어진 홍수환과 ‘알폰소 자모라(멕시코)’와 벌인 WBA 밴텀급 타이틀 전에서 도전자 홍수환이 석연치 않은 12회 TKO패 당하자, 판정 불복에 이은 난동 그리고 지급 금 체 납 등의 문제로 WBA 집행부가 김태호와 세라노와의 세계 타이틀 매치를 전면 철회해버렸다.

일각에서는 김태호와 대결에서 자신이 없었던 세라노 측에서 억지 명분을 만들어 경기를 무산 시켰다는 말이 나오기도 했다. 우여곡절 끝에 1977년 10월 20일 김태호의 세계 타이틀 매치가 열렸다.

그는 세라노의 4차 방어 전 상대로 낙점 돼, 한국 복서들의 무덤이라 불리는 푸에르토리코의 수도 '산후앙'으로 날아갔다. 그런데 현지에서 스파링을, 하다가 김태호는 오른쪽 눈에 큰 부상을, 입고 만다. 이런 불리함에도 실제 경기에서 김태호는 챔피언 세라노를 상대로 3회 전광석화 같은 라이트 일격으로 선제 다운을 뺏는 등 7회까지는 대등한 경기를 펼쳤다.

그러나 무더위로 인한 체력 저하, 눈 부상으로 인한 거리 감각 상실 등, 핸디캡을 극복하지 못하고 10회에 T-KO로 무너졌다. 경기 후 김태호는 오른쪽 눈 밑을 여덟 바늘을 꿰맸다. 그리고 1979년 3월 벌어진 김광민과의 라이트급 4강 전을 끝으로 12 전 10승(4KO) 2패의 기록을 남기고 천재 복서 김태호는 링을 떠났다.

6. 격동기 시대의 풍운아 김태호의 변신

은퇴 후, 김태호는 ‘월드와이드 서비스’라는 용역회사를 이끌며 사업가로 변신에 성공했다. 한국 복싱 격동 기 시대의 풍운아 김태호는 현역 시절 비록 올림픽 금메달과 프로 복싱 세계 챔피언 타이틀을 쟁취하진 못했다. 하지만 인생 3 막에 사업가로 변신하고, 지난날의 아쉬움과 미련을 모두 떨쳐냈다. 자랑스러운 복서 출신의 사업가 김태호의 건 승을 바란다.】

어떻습니까? 영광 뒤에 숨은 그림자 김덕권, 천만다행 일원대도(一圓大道) 원불교를 만나 인생의 낙조(落照)를 원도 한도 없이 화려하게 장식하고 떠나가네요!

단기 4356년, 불기 2567년, 서기 2023년, 원기 108년 8월 1일

덕산 김덕권(길호) 합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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