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달 수원 모처에서 장정구 챔프와 ㈜ 대청주조 주갑생 대표 그리고 사업 파트너인 김상현이사가 합석 장정구 ㈜대청주조 명예회장과 협약식을 가졌다.
현장에 참석한 난 주 대표에게 과거 장 챔프가 익수제약에 근무하던 시절 평생 이사란 타이틀과 함께 입단식을 했지만 얼마후 계약이 공중 분해된 전례를 설명하면서 이런 악습의 전철(前轍)이 되풀이 되지 않도록 복싱 대통령 장정구 챔프가 오랫동안 짱구 막걸리(가칭)를 상징하는 표지모델로 남길 부탁하였다.
이에 주 대표는 한번 맺은 인연 죽을 때까지 갈 수 있도록 노력하겠다고 화답했다. 주 대표에게 고향을 묻자 경남 하동이라 말한다.
경남 하동은 반야월 박건호 양인자 님과 함께 가요계에서 작사가로 명성(名聲)을 날린 작사가 정두수 선생 탄생지다.
그리고 정두수 선생을 통해 하동을 배경으로 탄생한 노래가 나훈아가 1972년 불러 히트한 (물레방아 도는데)란 곡이다.

이곡의 노랫말처럼 고향의 물레방아 돌아가듯이 두 분의 인연이 쉼 없이 지속(持續)되길 기대해본다.
지난 주말 상계동 백병원에서 진료 협력팀장으로 근무하는 30년 지기 이해정의 연락을 받고 노원역 인근의 음식점으로 출발했다. 식당에는 이해정의 아마복서 시절 인연을 맺은 도봉경찰서 강력팀장 김응희 경감도 동석했다.
김 경감은 오래전 내가 취재차 안동공고 교사로 근무하던 장흥민(한국체대) 선배의 자택을 방문할 때 첫 인연을 맺었다. 이해정 김응희 두 전직 복서는 나와 같은 1963년에 탄생한 토생원(菟生員) 들이다.
그리고 우리 3명은 한결같이 1989년 사회에 역군(役軍)으로 첫발을 내딛은 공통점이 있다. 이제 34년이란 세월이 흘러 두 전직 복서는 내년에 정년 퇴임을 한다. 이해정을 통해 나와 인연이 재점화(在點火) 된 김 경감은 안동공고 1학년 때인 1980년 곽귀근(경북체고) 송준석(전남체고)과 함께 청소년대표로 발탁되어 해외 원정을 경험한 촉망받는 유망주였다.

김응희는 1981년 제62회 전국체전 선발전 결승에서 경북체고 박정하와 일전을 펼친다. 박정하는 그해 5월 개최된 김명복 박사 배 LW급 에서 패권을 차지한 복서로 곽귀근 정희조 하종호와 함께 경북체고 4인방을 구축한 에이스였다.
이 대결에서 김응희는 수차례 왼손 카운터를 작렬시키면서 판정으로 잡는 대이변을 연출 본선에 진출한다. 복싱은 주먹으로 싸우는 경기가 아니라 심장(心腸)으로 싸우는 경기답게 언더독의 김응희는 탑독의 박정하 에게 불퇴전(不退轉) 전술로 강력하게 저항하면서 판정승을 거둔 것이다.
1983년 특기생으로 용인대에 진학한 김응희는 그해 인천에서 개최된 제64회 전국체전에 경북 대표로 출전했지만 8강에서 고배를 마시자 32전 26승(13KO) 6패의 전적을 뒤로하고 복싱을 접는다. 용인대학을 졸업한 김응희는 1989년 경찰에 투신한다.

1998년 10월 노원구에서 발생한 30대 가정주부가 결박 당한채 목이 졸려 살해 당하는 사건이 발생한다. 하지만 이 사건은 18년 동안 실마리를 찾지 못하고 영구미제(永久未濟)로 남아 세인들의 기억 속에서 시나브로 잊혀져 갔다.
18년이란 세월은 다산 정약용 선생이 전남 강진에서 유배 생활하면서 보낸 세월이고 박정희 대통령의 국정통치(國政統治) 기간이 18년이다. 또한 18년은 1983년 프로야구 해태팀 사령탑을 맡은 김응룡 감독이 한팀에서 복무한 기간(期間) 이다.
바로 그 18년 전 발생한 노원구 살인사건은 김응희 경감의 불타는 짐념 으로 다시 수면 위로 급부상한다. 결정적인 이유는 사건 당시 초년병으로 현장에 투입 되었을 때 그의 눈에 비친 피해자의 11살 딸의 애처로운 모습을 지울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복싱인 특유의 승부사 근성이 발동(發動) 용의 선상에 올라온 8천명을 대상으로 국과수의 협조를 받아 주도면밀(周到綿密)하게 용의자들의 신상을 분석 드디어 범인을 검거하면서 화룡점정의 대미를 장식한다.
복싱인의 한사람으로 박수를 쳐주고 싶은 대목이다. 동료 복서 이해정은 의협심 강한 김응희 형사에 대해 복싱인의 한사람으로 그가 내 친구인 것이 자랑스럽다고 말했다.

아시안게임 2연패를 달성한 이해정은 1963년 1월 30일 충남 대천 출신이다. 그는 탁구의 이에리사 레슬링의 박장순과 함께 대천이 배출한 스포츠 3대 스타다.
아마복싱 백년사에 아시안게임 2연패를 달성한 복서는 이해정을 포함 김성은 김덕팔 김동길 백현만 문성길 등 6명이다. 대천중 3학년 때인 1979년 김명복 박사배를 석권한 그는 1980년 서울체고에 입성 정유성 안영수 방승현과 함께 서울체고 전성기를 펼친다.
특히 1981년 제 62회 전국체전에 자신의 체급인 LM 급에서 선배인 한병호에게 양보하고 미들급으로 출전 결승에서 신준섭(전북)을 꺽고 금메달을 획득한다.
한병호는 결승에서 김의진(전북)에게 석패 은메달을 획득한다. 졸업반인 1982년 이해정은 8월 아시안게임 선발전(LM급) 결승에서 그해 7월 개최된 제10회 아시아선수권 우승자인 김의진과 진검승부를 펼쳐 예상을 뒤업고 판정승을 거두면서 승선(乘船)에 성공한다.

본선 결승전에서 그는 시리아의 이드러스에 판정승을 거두면서 금메달을 획득한다.
사실 양궁과 함께 복싱은 국내선발전이 본선에서 우승보다 힘겨울 정도로 뎁스(depth)가 두터웠다. 이해정의 금메달은 1958년(동경) 대회에 출전한 김기수(성북고)가 웰터급에서 고교생 최초의 아시안게임 금메달을 획득한 이후 고교생 아시안게임 마지막 금메달로 등록되었다.
1983년 2월 한국체대에 진학한 이해정은 킹스컵 선발전 결승에서 홍기호(청주사대)를 꺽고 대회 최우수복서로 선정된다. 이제 무적함대로 변신한 21살의 혈기왕성한 그의 앞길은 꽃길이 펼쳐질 것 같았다.
그러나 83년 로마월드컵 선발전에서 홍기호에게 84년 LA 올림픽 선발전에서 안달호(일우공영) 에게 1985년 서울 월드컵 선발전에서 박시헌 (경남대)에게 각각 충격적인 3패를 당하면서 슬럼프에 빠진다.

2진으로 참가한 1983년 제11회 아시아선수권 (일본) 대회 우승을 차지하면서 전열을 추스린 이해정은 1986년 아시안게임 선발전에서 숙적(宿敵) 박시헌 (경남대) 을 판정으로 잡고 대표팀에 복귀한다.
4월 리노(미국) 세계선수권대회에 출전한 이해정은 그해 서울에서 개최된 아시안게임에서 결승에 진출한다. 결승전 상대는 한국의 장한곤(한국체대)을 꺽고 1983년 아시아 선수권(오끼나와)을 재패한 둔탁한 파괴력을 보유한 오기와라 였다.
이대결 에서 이해정은 속사포 같은 연타를 명중 3회 RSC승을 거두면서 아시안게임 2연패를 달성 국민훈장 백마장과 거상장을 수상한다. 그리고 자신의 기량이 꼭지점에 도달함을 감지한 그는 미련 없이 복싱을 접는다.
현역 은퇴 후 그는 당곡중 코치로 재직하면서 팀을 학생선수권 대회에서 종합우승을 시키면서 최우수 지도자상을 수상한다. 투타임 WBC 페더급 챔피언 지인진은 당시 그가 발탁 조련한 복서였다.
담화를 마치자 장정구 챔프에게 연락이 온다. 오후 5시에 종로 3가에 위치한 쉘브르에서 박인규 선배와 약속 때문이었다.

장 챔프를 초청한 1956년 화순태생의 박인규는 1975.6년도 태국 킹스컵 태회에 숙적 황철순을 물리치고 국가대표 밴텀급 자리에 올라 2회연속 은메달을 차지한 슬러거다.
이런 상황에서 이해정 팀장이 장 챔프와 나를 목적지 까지 자신의 승용차로 동행을 해줘 무척이나 고마웠다.
현장에 도착 박인규 장정구 백인철 챔프와 대화를 나눴다. 이해정과 백인철 챔프가 해후한 장면을 보자 불현 듯 한국 아마복싱과 프로복싱 전성기인 80년대 가 뇌리를 스쳐 지나간다.
프로복싱은 최절정기인 1983년 한국 프로복싱은 동양 챔피언 12명중 11명이 한국 복서들 이었고 백인철은 당시 JR. 미들급 동양 챔피언이었다. 여담이지만 당시 밴텀급에 일본의 무라다,에이지로가 동양 챔피언으로 포진되어 있었는데 이 선수는 박인규가 일본에 원정 무승부를 기록한 복서였다.
1986년 한국 아마복싱은 그해 개최된 서울 아시안게임 복싱 12체급 전 체급을 석권하는 신기원을 창출 했고 이해정은 LM 급에서 금메달을 획득했다. 여기에 모인 복싱인들은 공통점이 있었다.
바로 상대를 배려 할줄 아는 너그러움이 묻어난 복서란 점이다. 장정구는 세계정상에 올랐을 때 스폰서 에서 들어오는 급료와 경기후 지급되는 격려금을 트레이너는 물론 운전기사까지 골고루 챙겨준 복서다.

인생 3막을 맞이한 장 챔프는 얼마 전 대청주조(大靑酒造) 명예회장으로 선임되어 활로(活路)가 크게 열렸다. 이해정 역시 백병원에 근무하면서 어려운 복싱인들에게 많은 의료혜택과 각종 편의를 제공한 의(義)로운 복싱 인이다.
그러한 행동들이 난 세계챔피언과 올림픽 금메달이란 타이틀 보다 가치(Value) 있는 일이라 생각한다, 오래전 읽은 지금은 고인(故人)이 되신 이외수 선생의 글이 생각난다.

나쁜 놈은 좋은 글을 쓰지 못한다. 어떤 놈이 나쁜 놈일까. 나는 딱 한가지 부류밖에 없다고 생각한다. 바로 나뿐인 부류(部類)다. 그러니까 (나쁜 인 놈)이 바로 (나쁜 놈)이다. 나쁜 인 놈은 음운학적(音韻學的)인 변천 과정을 거쳐 나쁜 놈이 되었다. 다시 말해 남들이야 죽든 말든 자기만 잘되면 그만이라는 부류들이 바로 나쁜 놈에 속한다.
각설하고 이제부터라도 너와 내가 아닌 우리라는 공동체 의식을 지니고 활기차게 전진하는 한국복싱의 자화상(自畵像)을 그려보면서 김응희 경감과 이해정 진료협력팀장의 무궁한 발전을 기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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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영섭기자는 복싱 전문기자로 전북 군산 출신으로 1980년 복싱에 입문했다.
1963년: 군산출생 1983년: 국가대표 상비군 1984년: 용인대 입학 1991년: 학생선수권 최우수지도자상 1998년: 서울시 복싱협회 최우수 지도자상 현재는 문성길 복싱클럽 관장을 맡고 있는 정통복싱인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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