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검은 황금밭’과 ‘검은 반도체’에 닥친 위기
해조류의 위기가 다가오고 있다. 지구온난화에 의한 수온 상승 때문이다. 해조류의 수확량은 수온에 의해 결정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대표적인 바다 작물인 양식 김의 수확이 급격히 줄고 있다. 김 양식의 최적 해수 온도는 10~20°C인데 20°C를 웃돌고 있다. 고수온 현상이 지속되면서 김 수확량이 급감했다.
일본발 최근 뉴스에 따르면, 일본의 올해 김 작황은 사상 최악이다. 50년 만의 최저 수확량이라는 2019년(마른 김 64억 장)보다 나쁘다고 한다. 50억 장 미만으로 떨어질 전망이다. 일본의 부족한 수요를 한국산 김이 대체하고 있다. 또 K-푸드 바람과 함께 세계적으로 K-김 열풍이 불고 있다. 우리나라 소비자는 그것을 마냥 좋아할 처지도 아니다. 수출 증가에 따른 수요부족으로 한국에서도 김값이 금값이 됐다. 김 한 톳(100장)의 도매가격이 1만 5,000원을 넘었다. 밥도둑이 지갑 도둑 된다는 말이 허언이 아닌 듯하다.더 큰 문제가 있다. 일본의 ‘재난’이 남의 일이 아니다. 우리나라 바다 수온은 지난 55년 동안 1.36°C 상승했다. 전 세계 평균보다 2.5배나 가파르다. 일본 김 작황 부족의 원인인 황백화 현상(영양분의 부족으로 김이 누렇게 변하는 현상), 플랑크톤의 급증, 물고기 공격 등이 우리나라 양식장에서도 발생하고 있다.

김 양식장을 흔히 ‘검은 황금밭’이라고 부른다. 김을 ‘검은 반도체’에 비유한다. 돈이 되는 자원이라는 의미다. 사실 그랬다. 한국은 2023년 해조류 수출액이 4조 원을 넘었다. 그중 김이 1/4을 차지했다. 125개국에 수출한다.
과거 서양인에게 김은 ‘검은 종이’였다
하지만 불과 몇십 년 전까지 유럽이나 미국 사람은 한국의 김을 처다도 보지 않았다. 해조류 자체를 즐기지 않았다. 김을 먹는 동양인을 ‘검은 종이 먹는 미개인’으로 취급했다. 러일 전쟁 때 러시아군은 단백질 보충을 위해 김을 먹던 일본군을 그렇게 불렀다. 그런 인식은 2차 대전까지 바뀌지 않았다. 일본군은 미군 포로 식사에 김을 지급했다. 전범 재판이 있을 때 김을 먹었던 포로들은 김 배급을 ‘포로에 대한 가혹행위’라고 주장했다. 김을 ‘검은 종이’로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미군 포로가 조선시대의 김값을 알았다면 웃지 못한 에피소드는 생기지 않았을 것이다. 17세기 중엽 조선의 김값은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비쌌다. ‘해의(海衣·종이나 옷감처럼 넓게 펼쳐 말린 물김) 1첩(10장)의 값이 목면 20필’이었다. 김이 이끼처럼 바위를 덮어서 '해의'라고 불렸다. 북벌을 기획했던 영의정 이경여가 효종에게 보고한 내용이다. 당시 성인 남성(양민)의 군포가 1년에 2필이었다. 군포는 군역 대신 내는 세금이다. 김 한 장이 성인 남성의 군포와 맞먹었다는 얘기다. 사실 조선시대와 비교할 수는 없어도 필자의 어린 시절에도 참기름을 바른, 구운 김을 먹는 집은 흔치 않았다. 김이 귀했던 이유는 양식하기 어려워서다.
지금도 전남과 충남의 해안지역에서는 ‘해이(海衣)하다’라는 말이 남아있다. 김 농사를 짓는다는 의미다. 김 재배도 씨 뿌리고 거두는 과정을 거친다. 하지만 바닷물 속에서 짓는 농사가 뭍에서 짓는 농사보다 쉬울 리가 있는가. 거기다가 김 농사철은 추운 겨울이다.
그렇다면 우리나라의 김 양식은 언제부터 한 것일까. 적어도 400년은 거슬러 올라간다. ‘우연한 발견’이었다. 병자호란 때 의병을 일으켜 청나라 군사와 맞서던 김여익에 의해서다. 그는 조정의 항복 소식을 듣고 은둔처, 광양 태인도로 내려왔다. 해변에 밀려온 참나무 가지에 붙은 김을 봤다. 그는 바다에 떠다니는 김 포자가 착상하도록 갯벌에 참나무와 대나무, 밤나무 가지를 세웠다. 나뭇가지에 붙은 포자는 김으로 자라났다. 바로 ‘섶나무 양식’의 시작이었다. 그는 양식에 그치지 않고 김 건조법도 개발했다. 이때부터 김 가공도 가능해졌다. 1640년에서 1660년 사이의 일이다.
조선은 김 양식업의 시조국이었다
김여익이 최초의 김 양식자임은 입증된 것일까. 당시 광양 현감인 허심이 쓴 김여익 묘표(묘비의 한 종류로 죽은 이의 행적을 적은 입석)에 남겼다는 기록이 《동국여지승람》에 기술되어 있다. 묘표는 없어졌다. 세계 최초의 김 양식 발상지를 도쿄 인근 시나가와와 오오모리 해변이라고 주장하는 일본보다 50년 이상 앞서 김 양식을 시작했다. 일본의 김 양식도 섶나무 울타리에 김이 붙어 있는 것을 보고 착안했다고 전해진다. 우리와 크게 다르지 않다.

김여익에 의해 개발된 섶 양식법은 그 뒤 200여 년이나 지속됐다. 1840년대 대나무 쪽으로 발을 엮어 한쪽은 바닥에 고정하고 반대쪽은 물에 뜨도록 한 떼밭 양식이 개발됐다.
20세기 들어 김 양식업은 퀀텀 점프를 한다. 영국인 과학자 캐서린 메리 드루베이커에 의해 인공파종 기술이 개발됐다. 일본과 한국은 이 기술을 도입하면서 김 양식업의 새로운 전기를 마련했다. 김 종자를 이용한 대량 재배가 가능해진 것이다.
물론 우리 민족은 양식 이전에도 김을 먹었다. 삼국시대부터 김을 먹었다. 《삼국지위지동이전》에 옥저가 고구려에 ‘해조류’(당시에는 해초의 구분이 없었음)를 조공 바쳤다는 기록이 있다. 송나라 서긍이 쓴 《고려도경》에 평민이 해초를 즐겨 먹었다고 적고 있다. 명나라 사람이 먹는 모든 약초와 해초를 수록했다는 《본초강목》(명, 이시진)에는 김 채취 방법까지 적고 있다. ‘신라의 깊은 바닷속에서 채취하는데, 허리에 새끼줄을 묶고 들어가 따온다’라는 게 그 내용이다. 조선시대로 넘어오면, 김에 관한 보다 구체적이고 다양한 사료가 있다. 김은 나라에 바치는 세금(공물) 중 하나이자 매월 초하루 임금에게 올리는 음식인 ‘삭선(朔膳)’에 포함되어 있었다. 선조실록과 정조실록에 의하면 백성의 고통을 줄이기 위해 김을 공물에서 제외하기도 했다.
일본에는 ‘김의 날’도 있다
한국과 일본은 김 양식의 발전 경로가 비슷하다. 하지만 먹는 방법은 우리와 조금 차이가 난다. 우리는 김에 참기름과 소금을 첨가해서 먹었다. 19세기에 편찬된 요리책, 《시의전서》에 의하면 ‘김쌈’에 대한 설명이 나온다. 김의 잡티 제거하고→소반 위에 펴고→발갯깃(기름을 찍어 바를 때 쓰는 꿩에서 떼어 낸 깃털)으로 기름칠하고→소금 뿌려 재우고→굽고→4각형으로 자르고→복판에 꼬지를 꽂는 순서로 요리한다. 《동국세시기》에는 김으로 밥을 싸서 먹는 ‘복과’를 설명하고 있다. 지금과 먹는 방법이 큰 차이가 없다. 일본은 우리처럼 기름과 소금을 치지 않는다. 대신 단맛을 내는 조리 김(아지츠케노리)과 아무런 맛이 나지 않는 나마노리(생김)을 선호한다. 생김은 간장에 찍어 먹는 게 보통이다. 그만이 아니라 일본 사람은 우리와 달리 얇은 김보다는 도톰하고 질긴 김을 더 좋아한다. 물론 값도 도톰한 김이 비싸다. 그것은 반찬 대신 간식이나 안주로 더 많이 먹기 때문에 그런 것인지도 모르겠다. 결국 문화의 차이다.

일본은 우리에 못지않은 김을 좋아하는 나라다. 그 역사도 우리나라 못지않게 유구하다. 몬무(文武) 덴노가 702년 2월 6일에 ‘다이호 율령’을 제정·반포했다. 이 율령에는 김이 조세의 대상에 포함되어 있다. 다이호 율령은 김에 관한 가장 오래된 일본의 기록이다. 이를 기념하여 기리는 날이 노리노히(김의 날)이다. 법령 반포일인 2월 6일이다.
또 종이 형태의 네모난 김이 탄생한 것은 1717년이다. 양식한 김을 잘게 다진 후 사각 틀에서 얇게 펴 말린 ‘아사쿠사노리(浅草海苔)’가 그것이다. 이것이 한지를 만들 듯이 얇게 펴셔 말린 ‘이따노리(板海苔)’로 발전하게 된다.
일본에서 가장 흔한 선물이 바로 김이다. 호불호가 전혀 없기 때문이다. 그중에서도 가장 인기가 좋은 것은 야마코토야마노리다. 김 가격이 캔 하나에 10만 원을 훌쩍 넘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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